멀리선 본 아크로폴리스


고대유적 답사

해 뜨기 전 출발하여 3시간 후 육지 속 바다 같은 호수를 가로지른 신설도로에 닿았다. 아침 햇살에 비친 염호의 신기루 같은 현상 속으로 빨려들듯 내달려 땅과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한참을 더 가 이윽고 드문드문 초목이 보이는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가까웠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20여 분 걸어서 언뜻 보아도 오래된 유적지임을 알 수 있는 펑퍼짐한 언덕 아래에 도착했다. 이곳 사람들이 '미친 나무'라고 부르는 가시가 촘촘히 박힌 나무 밑에 몇몇 관광객이 있고 이곳저곳 유적지 복원 인부들의 일하는 모습 뒤로 석곽으로 둘러쳐진 언덕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초기 인더스문명의 발상지 중 한 곳인 ‘돌라비라 유네스코 유적(Dholavira UNESCO Heritage)’이며 5,000년 전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언덕이다.

발굴중인 아크로폴리스
키란과 현장 책임자


유적은 두 개의 하천 사이에 있는 사방 1km 규모의 고대 도시였다. 기후조건이 여의찮은 건조지역이기 때문에 물을 관리하기 위한 시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밖에도 도자기를 비롯한 각종 구슬과 장신구 등을 만들어 멀리 이집트와 가까이는 중동의 아랍지역과 교역을 통해 부를 누렸다고 한다. 사암으로 축성한 언덕 위에는 지배계층과 관료들이 살고 성채 아래엔 중간계층 더 아래는 하층민들의 삶의 터전과 양곡 창고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수천 년 세월을 증명하듯 땅속에 잠자고 있었다. 성의 남서쪽은 크고 작은 저수 시설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동문 밖에는 가로 200m 세로 60~70m 규모의 광장이 있어 그 옛날 각종 행사 및 경연장으로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었다.

현재 지상의 모든 건축과 시설물은 흔적 없이 소멸하였지만 땅 밑에는 저수조와 수로, 우물을 중심으로 생활과 관련된 시설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고대 지식사회의 존재를 상상케 한다. 전체 유적의 규모와 구조로 미루어 기원전 3,000년 전 이곳은 발전된 문명이 존재했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이 유적은 1960년대 한 고고학자가 메마른 가시덤불 밑에서 그 존재를 확인했으며, 1990년 인도 정부가 대대적 발굴 작업에 착수하여 수천 년 땅속에 묻힌 인더스문명을 깨우게 된 것이다. 아크로폴리스 일대는 지금도 발굴과 보수가 계속되고 있는데 현장에서 만난 자이말(Jaimal)씨는 원래 파키스탄과 접경인 이곳 주민이었다고 했다. 유년기 국경 주둔군으로부터 힌두어를 배웠는데 처음 발굴 사업이 시작될 때 힌두어를 쓰는 유일한 주민으로 발탁되어 현재까지 30년 넘게 발굴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 사람들은 구자라트어를 쓴다) 그는 10여 년 전 한국의 다큐 제작팀을 돕기도 했는데 당시 김해시와 자매결연을 추진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허황후 이야기를 했더니 그도 당시 접촉했던 한국의 다큐 팀이 "허!"라고 외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현재 이 지역은 지각 변동으로 인한 환경의 변화로 불모의 땅이 되었으며 파키스탄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인적이 드문 변방처럼 보인다. 그러나 ‘돌라비라’ 뿐만 아니라 고대 유물과 유적들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문명의 초기 이곳은 물산이 풍부하고 폭넓은 교역이 가능한 곳이었던 곳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바다가 육지가 되고 설상가상 강물은 멀리 물길을 돌려 수천 년 영화를 누리던 땅이 척박한 불모의 땅으로 바뀐 것이다. 땅에 갇힌 바다는 건기에는 소금사막, 우기에는 염호로 수많은 플라맹고(홍학)의 산란과 생육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이제 이곳은 인더스 문명의 유적과 염호와 소금사막 그리고 플라맹고를 보러 오는 사람들로 다시 붐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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