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진주고등학교 교사)
『장자』 ‘칙양’의 첫 부분에 ‘공열휴’ 이야기가 나온다. 공열휴는 겨울에 강에 들어가 자라를 잡고 여름엔 산그늘에 쉬는 존재로 표현되는데 형식과 기준을 넘어선 존재, 즉 도를 이룬 존재로 묘사된다.
그런가 하면 ‘칙양’의 제일 마지막 부분 “非言非黙 議其有極비언비묵 의기유극" 즉 언어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어야 궁극의 경지를 논의할 수 있다. 좀 더 풀어 말하자면 언어에 의한 표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침묵도 아닌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궁극의 경지를 논의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를테면 도는 언어의 형식을 넘어 존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장자’가 공열휴를 예로 든 것은, 칙양 처음 내용의 문맥 전체로 본다면 그런 존재에 대한 의미 없음이다. 뿐만 아니라 議其有極의기유극이라는 말에도 따지고 보면 그런 논의 자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이견 있음)
내가 40년 가까이 머물고 있는 학교 역시 이러한 도를 이루는 곳도, 또 이와 비슷한 도가 있는 곳도 아니다. 세상보다 더 탁하기도 하고 세상만큼 음모술수가 있는 곳이 학교다. 다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곳이라 부조리한 세상보다는 조금 덜한 장소가 되기 위해 법에 의해 그리고 사람들, 즉 교사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을 뿐이다. 교사는 그곳에서 스스로의 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도를 공부하고, 때로는 그 도를 타파하기도 한다. 세상에 절대적인 도는 없다는 가정하에서.
노자께서도 이미 도를 그렇게 파악하고 있었다.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날카로운 것들은 무디게 하고 얽힌 것들은 풀어 주며 빛나는 것들은 완화시켜 먼지와 같아지니…도덕경 4장 일부
도는 빼어나고 수승한 실체가 아니라 조화와 균형을 이루려는 자연처럼 그 자체가 도라는 말이다. 모든 극단(날카로움, 얽힘, 강렬한 빛)으로부터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도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아니 균형과 조화로 나아가려는 그 에너지가 바로 도인 것이다. 마지막 먼지는 세상 그 자체의 다른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자칫 이 조화와 균형이 오늘날에는 물타기로 보일 수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가 조화와 균형은 아니다. 참 어려운 것이 수준이다.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물타기요, 기준을 지키면 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준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그것 역시 자연이다. 어차피 우리는 도를 모르니 자연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이야기가 옆 길로 새지만 새 정부가 하는 일은 이전 정부 보다야 못할 수는 없다. 우리는 최악을 경험했기 때문에 현 정부의 일이 상대적으로 최악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오히려 더 나쁜 일도 더러 있다. 이 정부에서 도저히 없어야 할 일들, 조화와 균형이라는 관점… 물타기로 변질되어 도는커녕 이전에 보았던 그 최악으로 향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진은 떼죽나무 꽃... 이미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