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권 이사장


장준하 선생 서거 50주기 추도식이 17일 오전 10시 파주 통일동산 내 장준하 추모공원(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688)에서 300여 명의 시민추모위원과 독립유공자 후손, 정계와 학계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민주·평화·통일을 향한 걸음, 그 뜻을 잇다'라는 주제로 엄숙히 거행됐다.

“억울한 죽음의 진상조차 밝혀지지 못한 채 50년이 지났다”며 “국민주권정부가 들어선 지금, 반드시 선생의 의문사가 규명되기를 바란다”는 사회자 이응식 전 광복회 기조실장의 개회사에 이어 국민의례에서는 애국가를 ‘올드랭 사인’ 버전으로 제창하며 광복군 출신이었던 장준하 선생의 뜻을 되새겼고, 민주와 독립을 위해 산화한 영령들을 위한 묵념이 이어졌다.

이후 장준하 선생의 자필 시 '민족주의자의 길'이 고 성내운 교수의 육성으로 낭송됐다. 민주화 운동가였던 성 교수의 1980년대 녹음 음성을 디지털로 복원된 것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추모사에서 “광복 80년, 민주주의를 더 굳건히 다지고, 한반도의 평화를 다시 세워야 하는 과제 속에 맞이한 장준하 선생 서거 50주기가 각별”하며, 장준하 선생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양심이자 실천가”이며, “독립·민주·통일의 길에 몸을 던진 선생의 삶이 오늘 우리 앞에 남겨진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우원식 국회의장


우의장은 “‘일주명창(一炷明窓)’, ‘심지 하나가 창을 밝히고 있다.’ 선생께서 늘 가슴에 품고 사셨다는 이 글귀처럼, 장준하라는 이름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었고, 꺼지지 않는 양심이었습니다. 선생의 삶은 질곡의 현대사 그 자체였습니다. 선생은 총을 들어 일본 제국주의와 싸웠고, 사상계를 창간해 펜을 들고 독재와 부정부패에 맞섰으며,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길을 주창했습니다. 독립과 민주와 통일! 선생은 민족사의 제단에 자신을 아낌없이 던져 등불로 타올랐습니다. 선생께서 광복군 시절에 발행한 잡지의 제호, <등불>과 <제단>에 담긴 뜻 그대로였습니다.” “‘광야에서 돌베개를 벨지언정, 못난 조상이 될 수 없다.’ 학도병으로 징집된 일본군대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할 때를 회고하며 선생께서 남긴 이 말씀이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되는 까닭도 그래서일 것입니다.”라고 상기하면서, 또한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은 민주주의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과제”라며 국회의 역할을 약속했다.

이날 추모식은 장순향 민중춤꾼의 ‘초혼’ 공연과 합창단 ‘봄날’의 노래가 이어지며 깊은 울림을 전했다. 시민들은 독립군가를 합창하며 선생이 걸었던 길을 함께 되새겼다.

유족 대표로 인사에 나선 장호권 장준하기념사업회 회장은 “50년 동안 매년 선생의 뜻을 이루겠다고 다짐해 왔다”며 “이제는 반드시 부패와 친일, 불의의 잔재를 걷어내고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행사 후에는 선생 서거 50주기를 맞아 사상계 재창간을 기념하는 의미로 기념식수가 진행됐다. 이날 황금회화나무 두 그루가 심어졌으며, 각각 ‘사상계나무’와 ‘장준하나무’로 명명됐다.

돌베개를 형상화한 장준하 선생 묘소


1918년 8월27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장준하 선생은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돼 중국으로 건너간 뒤 부대를 탈출했다. 독립을 열망하며 ‘6천리 대장정’에 나선 끝에 1945년 1월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시대의 어둠 앞에 빛으로 맞선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은 이윽고 광복을 맞았다. 김구 주석 비서로 귀국한 고국은 그에게는 여전히 어둠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독재가 이어졌다. 선생은 글과 말로 다시금 빛이 되고자 했다. 1953년 민주주의와 한국 사회 정치·경제·문화 발전에 요체를 둔 월간지 ‘사상계’를 발간했다. 1962년에는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언론인 분야에서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어둠은 독재에 맞서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선생 앞에 만만치 않았다. 사상계는 1970년 김지하 시인의 ‘오적’을 실어 폐간됐다. 5년 뒤 선생은 목숨을 잃었다.

파주 장준하 추모 공원은, 2011년 5월 폭우로 광탄면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 있던 선생의 묘가 훼손되자 잠시 대전현충원으로의 이전이 논의되었으나, 당시 이인재 파주시장을 비롯한 파주시민들의 노력으로 2012년 8월 1일 통일로 인근에 조성되었다.(전종호 기자)

장준하 선생 부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