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운(전 청와대 검식관)

떡국과 떡국차례

예부터 우리는 한날한시 임금과 온 백성이 떡국으로 시작하면서 민족의 단합과 결속력을 강조했다. 떡국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상에 올린 것처럼 묵은닭과 꿩고기로 우려낸 국물을 내기도 하였고, 소고기 등심과 도가니를 사용하거나, 조선 마지막 주방상궁의 전수 방법처럼 소고기 장국에 삶은 떡을 넣어 소고기 산적과 계란지단을 얹어내기도 하였다.

청와대 관저에서 설을 맞는 대통령들도 설날 아침 떡국이 준비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신정 설날 아침 쇠고기 양지 육수를 낸 떡국을 먹었다. 배추김치를 비롯한 5찬에 샐러드, 생선구이와 갈비가 준비되었다. 하얀색의 떡과 국물을 따뜻하게 바라보면서 지난해 안 좋았던 일을 하얗게 잊고 새해 첫날을 밝게 시작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여러 단계의 검식활동을 통해 안전한 상차림을 준비하지만 최종적으로 상을 올리기 전 검식관이 먼저 한 그릇을 시식한다. 나는 한 그릇은 시식용으로 또 한 그릇은 ‘첨세병‘으로 늘 떡국은 두 그릇을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

김영삼 대통령 내외는 설 연휴를 맞아 거제를 방문하여 조부모 묘소에 성묘한 뒤 부모님 댁을 찾아 세배하고 친지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시간을 내어 고향을 방문한 해에는 설 명절의 차례상으로 여러 가지 제사 음식들과 함께 떡국을 올려 ‘떡국차례’를 지냈다. 차례주를 한 잔씩 하였는데 ‘세주불온’이라 하여 찬술을 한 잔씩 마셨다. 검식관과 함께 운영관이 친지분들이 차리는 차례 준비를 도왔다. 이때도 역시 올려지는 음식에 대한 검식관의 임무는 맛보다 ‘안전’이다.

설 선물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전방 군부대를 수시로 방문해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설을 전후하여 수고하는 장병들을 위해 현장에서 직접 손을 맞잡아 주고 한끼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 당시 최고의 설 선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전 전 대통령은 뚜껑에 봉황문양이 새겨진 인삼, 수삼도 선물로 보냈다.

대통령의 설 선물에는 당시 시대 상황도 엿볼 수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고향 거제산 멸치를 빼놓지 않았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주로 서민들이 먹는 김, 남도 한과를 보냈고, 찻잔 세트나 장식용 옹기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농민들을 위로하며 전국 8도 명품쌀로 만든 전통 민속주를 선물하였고, 이명박 대통령은 장애인들이 사회적 기업에서 생산한 떡국과 참기름, 참깨 등을 준비하여 소년소녀가장, 독거노인, 환경미화원 등 어려운 이웃들에게 보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롯한 소외계층에 대추와 버섯, 멸치 세트를 전달했고, 주한 외국공관장들에게는 중소기업의 화장품 세트를 선물했다. 박 대통령에게 받았던 떡 설 선물세트와 추석 선물 세트 상자는 우리 집 기물 창고에 아직 잘 보관되어 있다. 내가 퇴직한 이후 모든 대통령들도 의미 있는 설 선물을 나누어 주었으니 전통주, 지역 특산물을 빠지지 않고 준비하였다.


신년 휘호

대통령들은 새해를 맞아 청와대에서 새해 각오와 바람을 담은 신년휘호를 썼다. 신년 휘호의 효시는 이승만 대통령이다. 내가 청와대 근무 기간엔 대통령의 신년 휘호는 전통이라고 생각했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은 설날을 맞아 "나라가 부유하고 병력이 강하면 오랜 세월 자유를 누린다"는 뜻의 '국부병강 영세자유(國富兵强 永世自由)'를 썼다. 1979년 새해 박정희 대통령은 신년휘호 ‘모두 힘을 합쳐 앞으로 나아가자’라는 뜻의 ‘총화전진(總和前進)'을 썼다. 그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름 참석 중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미술품 시장에서 구입한 신년 휘호를 선물로 받았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당시 국민이 힘을 모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자는 뜻에서 '제심합력(齊心合力)'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휘호를 각각 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천년 새희망’이라는 신년휘호는 2000년 뉴밀레니엄을 맞는 국민들의 마음을 대변했고, 기억에 남는 이명박 대통령의 신년휘호는 2010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2012년 임사이구(臨事而懼)이었다.

청와대에서 2026년 새해를 맞은 이재명 대통령은 사자성어의 신년휘호는 아니지만, 붉은 말처럼 힘차게 달리는 해, 대한민국 대도약의 원년을 강조하는 신년 메시지를 남겼다. 우리 국민들은 신년에 어떤 의미의 글을 휘호로 남기고 싶을까? 나도 마음속에 올해의 바람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