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전 지수중학교 교장)
여러 문제를 품고 있으니 마음이 복잡하여 정리를 위해 도덕경을 펼친다. 그렇다고 노자의 가르침에 온전히 기댈 생각은 전혀 없다. 오래전 노자의 가르침이 해법이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만 노자의 가르침을 통한 참조는 가능하다. 거울에 비친 사물은 언어적으로 해석한다면 비유에 가깝다. ‘직유’ 일 수도 ‘은유’ 일 수도 있다. 거울에 비친 사물은 오로지 사물의 그림자일 뿐이다. 즉 거울은 사물의 본성까지 반사하지는 못한다.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노자는 도덕경 27장에서 선한 자와 선하지 못한 자를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선하다는 것은 불선으로부터 추출될 수밖에 없다. 선함이라는 규정이 독자적으로 발생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다. 절대적 선은 존재할 수도 어쩌면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절대 악의 상대편에 있는 것을 우리는 절대 선으로 파악한다. 기준의 문제는 헤집어 보면 볼수록 여러 면에서 모호해진다. 노자께서는 그 사실을 파악하셨는지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大迷, 是謂要妙.”(고선인자, 불선인지사. 불선인자, 선인지자. 불귀기사, 불애기자. 수지대미, 시위요묘.) “따라서 선한 사람은 불선한 사람의 스승이며, 불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바탕이다. 그 ‘스승’(즉 선)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바탕’(불선)을 사랑(충분히 검토한다는 의미) 하지 않으면, 지혜(오로지 분별 능력)가 있더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오묘한 이치다.” (도덕경 27장 부분)
현실의 모든 문제는 언제나 대립구도 속에 있다. 하나를 선이라 부르고 또 다른 하나를 불선이라 부르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가 선이라고 하고 상대를 불선이라 하니 사실은 선과 불선은 순환적이다. 나의 입장이라는 지극히 좁은 견해가 나를 반대하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상대와 만나는 순간 거의 나는 불선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그것을 편견이나 아집, 독선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 좁은 입장이 힘을 가지는 순간이 더러 있다. 그 힘이 부가되는 순간 돌연 세상이 불선으로 바뀌는 경우도 우리는 자주 경험한다.
이렇듯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본 노자께서는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는 지혜를 ‘襲明(습명)’이라 불렀는데 이는 ‘내면의 있는 지혜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것저것으로 분별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파악하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데 보통의 우리가 도달하기는 어려운 경지임에 틀림없다. 스스로 도덕경을 깊이 읽으면서, 동시에 글을 쓰면서 제법 많은 부분이 정리된 느낌이니 아주 희미하지만 나의 선, 혹은 불선이 다만 선과 불선의 희미한 그림자일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