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에 유독 내 눈에 띈 곤충이 사마귀다. 밭에서는 물론이고, 차를 타고 야외로 찾아 나선 카페 테라스에서도 내 자리 앞에 떡하니 앉아 있으니 마치 나를 따라다니기라도 하는 것인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거의 매일 거실 페티오 창에 붙어 있는 사마귀 두세 마리를 마주치곤 했다. 안에서 유리를 톡톡 치며 아침 인사를 건넬 정도로 친숙해졌다. 한 번은 밖으로 나가 바로 곁에서 유리를 톡톡 쳤는데 겁을 먹고 도망가기는커녕 꿈쩍 않고 붙어 있다. 사마귀가 자기 앞에 있는 수레를 막아서서는 못 가게 한다는 옛말 당랑거철(螳螂拒轍)을 제대로 실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장면을 목격했다. 사마귀 꽁무니에서 하얀 거품 같은 것이 나오고 있었고 검색해 보니 산란 중이라는 것이다. 방충망 위에서 무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산란 끝의 하얀 거품은 점점 굳어 방충망에 붙었다. 내가 놀란 것은 산란 위치였다. 늘 붙어 있던 유리가 아니었다. 우리 집의 방충망은 주름망인데, 산란한 곳은 주름망 맨 끝자리로 참으로 절묘한 위치다. 방충망을 열고 닫아도 떨어질 염려가 없을 위치, 새들의 포식 대상에서도 비켜 갈 은밀한 구석, 겨울엔 햇볕이 들어 따뜻한 곳이다. 과연 사마귀는 이런 조건을 의도적으로 고려해 산란 장소를 정한 것일까? 그렇다면 놀라운 수준의 모성 보호 전략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사마귀는 며칠 동안 알집 근처를 지키듯 머물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알집만 남았다. 주말에 온 아이들이 보고는 징그럽다고 떼내라고 했지만, 겨울이 되자 방충망을 접어 두었고, 그 주름 사이에 있는 알집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방충망 주름 사이의 알집은 철옹성처럼 안전하다.

농사를 오래 지어 온 분에게 사마귀의 여차여차한 일을 말하니 ‘사마귀는 움직이는 건 뭐든 사냥하는 포식성 곤충으로 벌레를 잡아먹으니 사람에게 해 될 것이 없다’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페티오 창 처마 구석에는 늘 거미들이 여럿 살고 있었는데 올해는 거미줄이 보이지 않는다. 사마귀들이 거미들을 잡아먹은 것일까? 내가 화들짝 놀란 것은 그다음 말이었다. ‘내년 봄에 200마리쯤 어린 유충(날개는 없고 몸길이는 5~10mm)이 부화하고, 여러 번 탈피를 거쳐 몸이 커진다’ 고 하신다. 들었으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물론 많이 낳고 많이 잃으며 유지되는 곤충 세계의 질서(혹은 생존 전략 방식) 속에서 소수만 살아남겠지만, 잠깐일지언정 수백 마리의 유충이 방충망에 매달려 있다고 상상하니 아찔해진다. 그렇게 얼마가 지난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 오신 선생님들 중 한 분이 사마귀 이야기를 보태셨다. 자녀가 어렸을 때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 주며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는데, 하루는 아이가 골라 온 책이 사마귀에 관한 그림책이었다고 한다. 사마귀의 산란과 부화 과정의 그림책을 읽어 주는데 어찌나 징그러운지 어쩔 줄 몰라 했더니, 아이는 엄마의 그런 모습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던지 그날 이후 한동안 그 책만 가져왔다고 한다.

황대권 작가의 『야생초편지』도 소환되었다. 오랜 감옥 생활로 한 평짜리 독방에서 또 교도소 운동장 한구석에서 야생초를 기르며 사유한 글 중에 사마귀 생태에 관한 두 편의 글이 있다. 사마귀가 거미를 사냥하는 모습과 교미하는 모습 등의 내용은 포복절도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재미있지만 내가 궁금해하는 부화와 유충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사마귀는 풀잎을 먹고 사는 메뚜기, 여치와는 달리 오로지 살아 있는 먹잇감만 노리는 포식자라고 해서 그 생김새를 자세히 보았다. 옅은 갈색의 날개와 초록색의 기다란 몸통은 쓰다듬고 싶을 정도로 유연하다. 여느 풀벌레와 같아 보이는데 앞다리가 길고 낫처럼 접혀 있으며 톱날 같은 가시와 갈고리가 있다. 게다가 머리는 뒤까지 180도 회전해서 돌릴 수 있다니 과연 사냥꾼다운 몸체다. ‘움직임 하나 없이 기다리다가 먹잇감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번개처럼 긴 앞발을 뻗어 잡아 덮친다. 만약 앞발이 미치지 못하는 거리에 있을 경우 사마귀의 움직임은 음흉스럽기 그지없는데 얼마나 천천히 접근하는지 언제 보아도 마치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다. 군대 훈련 중에 ‘야간 정숙 보행’이 있는데 칠흑 같은 밤에 적의 진지를 시속 몇 미터의 속도로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침투하는 보행이다. 사마귀가 목표물에 접근하는 모양이 꼭 그렇다.’ (야생초편지, 135쪽) 사마귀의 생태에 관한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사마귀는 아무 데나 산란한 것이 아니었음을 추론할 수 있었다. 포식 대상이 절대 될 수 없는 우리 집 방충망 끝자락을 살피고 살펴 골랐을 것이 확실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란 말은 오랜 교육 과정을 통해 별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을 지닌 유일한 존재로 보았고, 따라서 다른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여겼다. 신학자들은 인간만이 영혼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만물이 신의 피조물이라는 주장은 믿음의 영역이고 나 역시 그 믿음의 영역 안에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이며 영혼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다른 피조물들 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인간의 이성과 영혼이 특별함을 의미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곧바로 우월성과 지배의 정당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나는 머뭇거린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28)의 ‘다스림’이 자연적 위계를 수용하고 인간의 우월성을 기반으로 한 지배와 통제의 권리를 의미하는 것일까? 피조물의 세계에서 인간 중심적 시선에 익숙해진 나에게 사마귀 한 마리가 그 시선을 멈추게 한다.

귀촌 이후 예전엔 가까이 보기 힘들었던 생명들이 이제는 일상처럼 곁에 있다. 지렁이를 주무르기까지는 못해도 만나면 반갑다. 여치와 메뚜기와 사마귀도 잘 구분하지 못하다가 유독 내 눈앞에 자주 나타나는 사마귀를 정확히 구분하여 알아보게 됐다. 봄, 알집에서 수백 마리의 유충이 매달려 있을 사진과 동영상들을 보내 달라는 손님들에게 얼결에 그러겠다고 했다. 산란일은 9월 25일, 지금은 해를 넘긴 겨울의 한 복판 1월이다. 하루에 한두 번씩 실내 공기를 환기 시키려고 유리문을 열고 방충망을 펼치며 본의 아니게 알집의 안전을 확인하고 있다. 마치 ‘보호자’가 된 듯하지만 아직은 어디까지나 ‘구경꾼’이다. 다만 그들의 세계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단순한 구경거리로만 여기지 않으려 한다.(얼치기 농부 김상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