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관산중학교는 지난 6월 27일(금) 1교시를 마친 후, 총 43명의 교직원이 참여하여 ‘2025년 교육과정 및 공개수업 나눔 워크숍’을 당일 일정으로 인천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하였다. 이를 진행하는 교육연구부에서는 사전 답사도 다녀오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특히 이 학교는 이주배경 학생들이 대부분이기에 더욱 이러한 배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먼저 도슨트 선생님과 함께 이민사 전체를 아우르는 전시를 보면서 해설을 들었다. 공식적으로 남아있는 미국 하와이 이주는 1902년부터 1905년까지 64회에 걸쳐서 7,400여명이 이주했다. 그곳에서 나이 들어가던 총각들을 구제하고자 고국에 있는 신부를 데려와야 하는 상황에서 ‘사진 신부’가 등장했다. 이 당시 혼기를 훌쩍 넘긴 노총각들의 결혼 문제는 초기 이민자들의 정착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남성의 수가 여성보다 10배나 더 많아 배우자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궁여지책이 사진결혼이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중매쟁이를 통해 700여명 정도의 사진 신부들이 결혼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갔다. 사진만 보고 결혼을 하다 보니 그들의 평균 나이 차이는 무려 15살이나 되었다. 이로써 본격적인 초기 한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사진 신부들 또한 개척자로서 강인하고 적극적인 삶을 꾸려나갔다. 하와이에서 열악한 농업노동에 종사하였지만 이민자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조국의 독립자금을 대고 인하대학교 건설을 위한 자금을 댔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이 강인하여 한인회, 한인부인회와 같은 공동체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이 자녀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이었다. 이어서 교회를 개척하여 신앙생활을 하며 자녀 교육에 일생을 걸고 살았다. 하와이 한인 이민 사회를 살린 것은 강인한 한국의 어머니였다고 해설사는 말해준다.
구한말의 불안한 정세와 계속되는 가뭄으로 한인들은 국경을 넘어 현재 중국과 러시아 땅인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이 1875년에 청나라 발상지인 만주 지역의 봉금령을 해제하고 이 지역으로 한인들의 이주 및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자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의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인들의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연해주 지역에도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이주가 진행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한인들의 일본 이주도 이루어진다. 일본 이주는 초기 유학생을 시작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농민, 노동자들의 이주가 이어졌다. 한편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일본은 70만 명이 넘는 한인들을 강제 동원하여 일본 국내뿐 아니라 사할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중국, 러시아, 일본, 사할린 등 한반도 주변 지역으로의 이주가 본격화된 가운데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 정권의 한인 이주 정책으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강제로 이송되면서 한인들의 거주지는 주변국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확장되었다. 한편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중남미와 독일 등지로 이주가 이루어졌다.
중남미 이주는 1905년의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의 이주가 그 시작이다. 이후 멕시코의 혼란을 피해 1921년 쿠바로의 이주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때의 이주는 일제강점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지속되지 못하였다. 본격적으로 중남미 이주가 이루어진 것은 1962년 이후이다. 새로운 일터를 찾아 브라질과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지로 이민이 이루어졌다.
독일 이민은 1960년대 광부와 간호사의 파견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당시 서독은 경제성장과 함께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고, 우리는 외화 부족과 실업의 대책으로 광부, 간호사, 조선 기술자 등을 파견하였다.
이어서 세미나실에서 김상열 관장님의 특별 강의가 이어졌다. ‘고려인 이민 역사 이야기’이다. 우리 학교에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학생이 100여명에 가깝다. 그들은 대체로 고려인이다. 바로 그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청한 것이다. 1864년부터 이주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집안 전체가 옮겨가거나 독립운동가들이 몸을 피해 숨어든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 정권 시기에 일본인과 구별이 안 된다는 이유로 조선인들을 우즈베키스탄 우슈토베라는 곳에 짐짝처럼 부려놓았다. 그들이 ‘까레이스키’ 즉 고려인이라 부르며 서로를 부둥키며 살아남았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던 고려인 50여만 명과 중국 동북 지역에서 조선족 자치를 하며 살던 중국동포 200여만 명이 있는데, 그중 고려인 10만, 중국동포 100만 정도가 한국으로 이주한 상태로 추산하고 있다. 본교는 그 아이들을 맡아서 교육을 하고 있는 터라 이민사와 관련하여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진한 감동이 있었다.
이어서 수업 나눔을 펼쳤다 국어과 임주희, 영어과 이명은, 정보과 오범석, 과학과 최강석, 수학과 김현화 선생님이었다. 발표자의 공통점은 다문화 학생을 위해 수업에 AI, 하이 러닝 등 다양한 에듀테크를 활용하여 수업 참여도를 높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한 다양한 시도를 볼 수 있었다. 수업을 더 잘하기 위한 수많은 실패 과정을 소개하며 큰 박수를 받았다. 더 좋은 결과는 수많은 노력이 쌓여서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을 선생님들을 통해서 배우는 귀한 시간이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교사들의 노력에 대하여 지종문 교장선생님의 격려가 이어졌다.
한편 인천관광공사에서 진행하는 버스 지원을 받아서 책소풍, 교직원워크숍 두 건을 해결했다(염경미 국제부장). 지원을 받는 만큼 해달라는 서류 요청은 많았지만 그래도 무료 지원은 달콤하지 아니한가?(글 염경미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