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47. 안녕, 코로나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5.24 05:22 의견 1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코로나19 시대를 지나고 있다. 뜬금없이 코로나19라니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고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떠들던 게 언제였던가? ‘카르페 디엠’이라 굳이 외치지 않아도 우리는 지나치게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산다. 당장 1~2년 전 일도 까마득한 기억의 구석으로 몰아넣고 외면하는 현대인의 무심함이 야박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저 왕관(corona)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그냥 잊어버리기엔 아쉬운 기억들이 많기 때문이다.

팬데믹이 선언된 게 2020년 3월 11일이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났다. 인간이 지닌 축복이자 불행은 ‘망각’과 ‘적응력’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놀라운 적응력으로 한 치도 만족이란 걸 모른다. 지금 몰고 있는 승용차와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 그리고 고사양의 노트북이 25년 전 초임 때에는 얼마나 꿈꿔왔던 것들인가! 그런데 일상이 되면, 그래서 적응을 해버리면 이내 만족하질 못한다. 따라서 살아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탐하게 되고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다. 헌데 어쩌겠는가? 이 불만족이 우리 문명 발전의 토대인 것을. 코로나19를 생각하면 적응력으로 무뎌진 기억들과 함께 망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잊을 수 있어서 고통을 감내할 수 있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게 인간에겐 참으로 아이러니한 축복이다.

2023년 5월 5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의 국제적 공중 보건 비상사태를 해제(엔데믹)하였다. 그동안 코로나에 걸리거나 사망한 사람은 몇 명일까? 역시 세계보건기구가 2023년 12월 23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첫 환자 발생 이후 4년여간 전 세계 확진자는 7억 7,154만여 명이고 각국 정부 공식 통계 집계를 더한 사망자는 697만 명이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는 정부 통계가 아닌 실제 사망자를 2천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한겨레신문 2023.12.25. 기사 인용). 국가별, 기관별로 다양한 데이터들 속에서 확실한 수치를 알기가 어렵지만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한 번씩은 확진된 경험이 있는 걸로 보아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는 더 큰 수의 예상이 맞을 것 같다. 코로나19에 확진된 경험이 2회인 사람도 주위에 있지만 백신의 영향이었는지 치명률이 낮아 돌아가신 분은 쉽게 볼 수 없었다. 그 백신을 나는 몇 번 맞았는지도 벌써 잊었다. 세 번이었나, 네 번이었나, 정확지 않다. 공포에 떨었던 지난날에 실소가 난다. 간사한 마음이 문제다.

코로나 이전에 전염병의 유행으로 학사일정에 큰 무리를 겪었던 것은 신종 플루가 대표적이었다. 당시 고3 담임을 하던 때 막강한 전염성과 감염 후 통증으로 인해 학교를 공포로 떨게 했던 바이러스였다. 그러나 신종 플루에 걸린 학생이라도 수능은 치를 수 있었다. 그럼, 감독은? 일단은 사명감이 투철하고 상대적으로 면역력이 강해(?) 보였던 선생님들의 자원을 받았다. 물론 암묵적인 학교별 할당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우리 학교에선 3학년 부장님이 지원해서 백신을 미리 맞고 고사장에 투입되었다. 80년대 얘기가 아니다. 21세기가 한참 지난 후의 일화다. 그때의 전통 덕인지 코로나 시대에도 확진자들의 수능 감독은 엄청난 방역복을 입고 투입된 교사들에 의해 무난히 치러질 수 있었다. 수능에 관한 한 대한민국은 불가능이 없는 나라다.

당시의 신종 인플루엔자(신종 플루)는 ‘타미플루’라는 특효약으로 한방에 종식되었다. 스위스의 다국적 제약회사인 로슈에 의해 독점 판매된 이 약을 만든 회사는 미국의 제약회사 길리어드 사이언스인데 주목할 점은 그 회사에서 약의 개발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재일교포인 김정은 박사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오랜 일본과 미국 생활을 접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바이오 기업(카이노스메드)을 경영하고 있다. 이름이 주는 뉘앙스 때문에 잘 안 알려져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은 나만의 편견일지 싶다.

코로나19 때 대입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해 고3은 학기 초에 등교를 하지 않아서 3월 전국연합 학력평가를 실시하지 못했고, 문제지는 학교에 옮겨진 채로 보관 중이었다. 어느 날 문제지를 원하는 학생에게 배부하라는 공문이 왔다. 이미 인터넷에서 출력이 가능한 문제지였다. 그런데 희망 신청을 받아보니 의외로 원본 문제지를 원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당시 인근 학교 고3 부장들과는 교육부에서 지침이 내려오면 어떻게 할지 서로 문의하느라 꽤 자주 통화를 했었다. ‘드라이브 스루(Drive thru)’ 등을 활용하는 우리나라의 방역 아이디어가 전 세계 언론의 찬사를 받을 때다.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시간대를 분류하여 아이들을 등교시켰고, 미리 문제지를 일일이 비닐 포장하여 학교 1층 로비에서 나눠주고 바로 귀가시킨 기억이 난다. 아이들 동선을 짜고, 문제지를 배부하는 선생님들을 순차적으로 배치하는 등 이전에 없던 새로운 업무들을 많이도 했다. 개학 날이 한참 지나도 학교에 오지 못했던 아이들이 오랜만에 학교에 와서 새 담임 선생님을 몇 초나마 만나고 문제지를 안고 집으로 가는 모습은 학교의 존재 이유까지는 아니어도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의 안도감을 주는 따뜻한 장면이었다.

원격수업 지침이 내려오자마자 수많은 회의를 거쳐 플랫폼을 선정하고 너희 학교는 구글 클래스룸이야? EBS 온라인 클래스야? 라는 질문을 하며 장단점을 비교하던 그때. 영화에서나 봤었던 화상 회의를 구글 미트나 줌 등으로 일상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던, 그리고 모든 선생님들이 1인 미디어 크리에이터가 된 듯 교과목 단원 콘텐츠를 제작하고 이를 업로드하기 바빴던 그 숨 가쁜 기억들을 이제는 퇴역한 노병처럼 아련히 떠올리는 게 놀랍다. 그뿐인가? 매일 점심시간마다 학생들의 자리를 한 칸씩 띄우고 방역 지침을 준수하며 밥을 먹였고, 식당과 교실 자리마다 칸막이를 설치하여 비말이 튀는 걸 막느라 고생했다. 마스크 착용은 의무여서 그 전에 교실에서 마스크 쓴 아이를 예의 없다고 꾸짖었던 경험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문화와 윤리가 얼마나 상대적인 개념인지 실감한 시기였다. 한 주일마다 두 개 학년만 등교하게 해서 학사일정을 매번 정정해야 했고, 특히 창의적 체험활동 중에 특강이나 캠프 등이 있으면 수차례 번복하며 조정했던 고난을 당시의 모든 대한민국 교사들이 겪었을 것이다. 코로나19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대한민국의 교사가 얼마나 순종적이며 유능한 집단인가를 말이다.

마스크를 오래 쓰다 보니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오히려 아이들에게는 외모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좀 더 내면에 충실해진 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얼평 공화국’이라고 유독 외모에 대한 관심이 큰 사회에서 아이들이 마스크로 그 스트레스를 가린 몇 년은 한 번쯤 주목해 볼 여지가 있는 시기라고 본다. MBTI 등 성격 검사가 유행한 것도 타인에 대한 관심을 나 자신에게로 돌려 오랜만에 내면을 바라보는 계기가 형성된 결과라는 견해가 있다. 공감이 가는 얘기다. 코로나 시기 마스크 착용으로 인한 청소년들의 자아 존중감 변화는 당시 떠올린 나의 작은 연구 주제였다. 그러나 바쁜 일과를 핑계로 결국엔 포기한 아이템이 되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이제는 모바일 부고장에 상주의 계좌를 알리고, 직접 문상을 가더라도 조의금 봉투를 따로 안 만들어도 되는 문화가 생겨났다. 축의금이라면 모를까, 예전에 조의금을 계좌로 부치는 일은 별로 기억에 없다. 하물며 상주 입장에서는 부고장에 계좌번호를 띄우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결례였다. 그러나 기억하다시피 장례식장에 방문이 금지되었던 연유로 어쩔 수 없이 해 본 일들이 지금은 괜찮은 일로 받아들여진다. 오히려 조의금을 중간에 전달하며 발생하는 걱정과 불편함이 없어진 점과 장례 후 가족들이 비용을 정리하는 데도 편리한 점에서 잘 바뀐 문화라는 생각이 든다. 재차 문화와 윤리가 얼마나 상대적인 것인지 느끼게 하는 변화이다.

그 혼란했던 시기가 지났다. 그 사이 경기 회복을 위해 전 세계적으로 많은 돈이 풀렸고 이는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기에 각 나라의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은 현재 진행형이다. 고금리로도 쉽게 잡히지 않는 물가로 인해 서민들의 삶은 전에 없이 고통스럽다. 학생들은 대면 활동의 부족으로 사회성이 그 전 같진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주요 대학들은 공식적으로 학생들의 학력 저하 및 인구 감소를 감안해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낮추고 있다. 가뜩이나 예의를 모르고 버릇없는 아이들이 늘어난다는 걱정이 컸는데 코로나19 시대는 그런 흐름에 불을 붙인 시기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요새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이집트 피라미드 벽에 있는 말처럼 유구한 불평이라고 본다. 원격 수업할 때나 마스크를 쓰고 학교에 올 때나 아이들 또한 고생을 많이 했다. 힘든 시기를 겪은 아이들이라 생각하면 딱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야 마땅하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 어려운 전 지구적 환란에는 늘 아이와 노약자들을 우선 챙겨왔던 게 인류의 도리였음을 기억한다면 그래도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대견하게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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