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의 철학, 노자 도덕경 산책(48)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3.28 07:04 | 최종 수정 2024.03.28 07:06 의견 0

김준식(진주고등학교 교사)

노자와 스피노자 사이의 무한 거리.

월요일이다. 월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출근하는 일도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멈출 것이다. 오랜 시간을 그렇게 유지해 왔음에도 여전히 월요일 출근은 부담스럽다. 비 오는 월요일 아침에 그 오래된 '유지維持'를 생각해 본다

유지, 즉 무엇인가를 변함없이 계속한다는 것의 동력은 무엇일까? 물론 약간의 관성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역시 인간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욕망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태도’ 정도이거나 또는 ‘자세’ 정도의 얇은, 거의 욕망이라고 말하기에는 곤란할 정도의 ‘태도’나 ‘자세’가 유지의 에너지원일 것이라고 추정해 본다.

이 유지 측면에서 세상의 이치를 이야기한 노자의 생각은 도덕경에서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居善地 心善淵 予善天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거선지 심선연 여선천 언선신 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도덕경』 8장 일부 "머묾은 땅처럼 낮고 마음은 연못처럼 깊으며 베풂은 하늘처럼 공평하고 말은 믿음이 있으며 정치는 바르게 다스리고 일은 능숙하며 움직임은 때에 맞다."

“거선지居善地” 이하의 일곱 상황은 모두 물의 성품을 묘사한 것이다. 물은 언제나 흐름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에 유지(물)의 측면에서 세상의 이치를 노자는 이렇게 파악한 것이다. 물은 언제나 낮고 겸손하다. 물이 낮은 곳을 찾아 흘러가듯이, 땅은 낮은 곳에서 생명을 키운다. 물은 깊을수록 흔들림이 적다. 깊은 연못 속은 언제나 고요함을 유지한다. 물은 늘 공평하다. 항상 공평公平과 무사無私의 태도를 유지하여 때론 우리의 현실적인 욕망을 완벽하게 파괴하기도 한다.

물은 언제나 변화하며 그 변화는 지극히 적절하다. 물은 고집하지 않고 주어지는 형세와 변화에 적절히 대응한다. 둥글거나 네모지거나 언제나 그 모습을 맞춘다. 패인 곳에는 고이고 차면 다시 흐르게 된다. 이것은 주역의 감지坎止의 경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물처럼 유지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구속하지 않으며 동시에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다. 따라서 물은 완벽하고 동시에 변함없는 유지의 실체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서양의 스피노자의 유지에 대한 생각은 이러하다.

제4 부 - 인간의 예속 또는 정서의 힘에 대하여

PROP. XX. The more every man endeavours, and is able to seek what is useful to him—in other words, to preserve his own being-the more is he endowed with virtue; on the contrary, in proportion as a man neglects to seek what is useful to him, that is, to preserve his own being, he is wanting in power.

.20.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할수록, 즉 자신의 유(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달성하면 할수록 더욱더 유덕하다. 그리고 반대로 각자는 자기의 이익을, 즉 자신의 유(존재)를 유지하기를 등한시하는 경우엔 무력하다.

유지하려 하고 노력하려는 것은 노자나 스피노자나 동일하다. 다만 결론이 다르다. 노자는 도의 경지에 이르려면 유지하기는 하되 낮아지고 깊어지며 공평하고 적절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반면 스피노자는 다만 유덕하다, 즉 긴장을 유지하여야만 된다는 것이며 심지어 그 긴장을 유지하지 못한 경우에는 무력하다고 말한다.

스피노자의 유덕이란 무엇일까? 서양에서 일반적으로 ‘Virture’ (라틴어: virtus)는 우리말 덕으로 번역되며 의미는 노력이나 교육으로 사회적인 규범과 도덕이 경지에 이르러 애쓰지 않아도 규범이나 바른 길을 저절로 행할 수 있게 된 상태를 뜻한다.(글로벌 세계 대 백과사전 참조) 그리고 유덕이란 그 덕이 있다는 말인데 유지의 결과가 그것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명징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도덕경이 말하는 물의 경지로 보이지는 않는다. 스피노자의 유지는 집착하지 않고 구속하지 않는 상황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왠지 좀 더 집착하고 좀 더 구속되는 상황으로 연결되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유지하지 못한 경우를 무력하다, 즉 힘을 더 원하는 것(he is wanting in power)이라고 풀이한다.

노자와 스피노자 차이의 원인은 많고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대상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노자의 시선이 해체적이라면 스피노자의 시선은 경직성과 일관성이 핵심이다. 서양에서 해체적 시각은 20세기 '데리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논의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동서양의 문화적 거리는 달과 지구만큼 멀리 있다.

물론 '데리다'의 해체도 노자의 해체와는 전혀 다른 면이 많지만 일단 이성의 경직성과 일관성에서 벗어나는 논의를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가진다. 이미 노자는 2000년 전에 경직과 일관이야말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장자 역시 ‘인간세’에서 무용지용無用之用의 경지를 이야기하는데 노자와 비슷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스피노자는 일관되게 덕을 유지하여야 덕이 있는 상황이라고 보았고, 노자는 그 유지를 내려놓아야만 마침내 도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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