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娛樂歌樂 시 읽기】13. 김남주, 나는 나의 시가, 시선집 <꽃 속에 피가 흐른다>, 창비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3.16 07:24 | 최종 수정 2024.03.25 07:31 의견 2

나는 나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

최신유행의 의상 걸치기에 급급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의 시가

생활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순수의 꽃으로 서가에 꽂혀

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나는 또한 바라지 않는다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형제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나의 시가

한과 슬픔의 넋두리로

설움 깊은 사람 더욱 서럽게 하는 것을

나는 바란다 총검의 그늘에 가위눌린

한낮의 태양 아래서 나의 시가

탄압의 눈을 피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기를

미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배부른 자들의 도구가 되어 혹사당하는 이들의 손에 건네져

깊은 밤 노동의 피곤한 눈들에서 빛나기를

한 자 한 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그들이 나의 시구를 소리내어 읽을 때마다

뜨거운 어떤 것이 그들의 목젖까지 차올라

각성의 눈물로 흐르기도 하고

누르지 못한 노여움이 그들의 가슴에 터져

싸움의 주먹을 불끈 쥐게 하기를

나는 또한 바라마지 않는다 나의 시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노래가 되고

캄캄한 밤의 귓가에 밝아지기를

사이사이 이랑 사이 고랑을 타고

쟁기질하는 농부의 들녘에서 울려퍼지기를

때로는 나의 시가 탄광의 굴속에 묻혀 있다가

때로는 나의 시가 공장의 굴뚝에 숨어 있다가

때를 만나면 이제야 굴욕의 침묵을 깨고

들고 일어서는 봉기의 창끝이 되기를

한 주간 김남주를 탐독했다. 혹독하고 무도한 권력의 시대를 지나며 한 인간이 어떻게 저항하며 피로 시를 쓰며 어떻게 살았는지 몸서리치며 읽었다. 그의 평전을 쓴 김형수에 의하면 김남주는 김수영과 신동엽의 물줄기를 아우르고 합하여 새로 길을 낸 시인이다.

소개한 이 시가 김남주를 대표하는 시는 아니다. 어떻게 본인이 아니고서 남의 대표 시를 뽑을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주제 넘는 짓을 한다면 나는 ‘자유’를 그를 대표하는 시로 본다. 다만 이 시를 다시 읽는 것은 이 시대에 시란 무엇인가, 시를 어떻게 쓰고 읽어야 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읽는 사람은 없어도 쓰는 사람은 넘쳐나는 시대이다. 쓴 사람 말고는 읽지 않는 문학지가 수백 개가 넘고 sns에는 시가 홍수 상태다.

시에도, 시 쓰기에도 딱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정답은 없지만 시 쓰기에 앞서 한번쯤 더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김남주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모두가 김남주처럼 전사가 되어 감옥에 가고, 시가 피가 되고 칼이 될 필요는 없지만, 삶의 방편이요 표현이 되지 못하는 이 시대 우리의 시는 얼마나 가벼우며, 우리의 시 쓰기는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권력 대신 화장한 얼굴을 하고 배시시 나타난 자본의 시대에, 그리고 난데없이 나타나 역주하는 좀비 권력의 시대에 시인은 어째서 소리쳐 싸우지 못하고 참새처럼 짹짹거리며, 시인입네 하는 뱃지에 집착하고 좀스럽게 시집이나 파는 장사꾼이 되어가고 있는가?

조재훈 시인은 시의 과잉, 시인의 과잉, 삶과 유리된 감정의 과잉, 외국 사조의 과잉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시 쓰기를 이렇게 일갈하고 있다.

시를 쓴다는 것, 부끄럽구나

아름다운 말을 골라야 하는가, 시여

일하는 이는 손, 숨어 우는 아이의 눈물

억울하게 눈 감은 가슴을 떠나

말을 비틀어 무엇을 짜는가

은행 앞 플라타너스에는

새도 와서 울지 않고

버려진 애가 쓰러져 자는데

버려진 애의 건빵만도 못한

시여, 화려한 문패여

겨울 공사장 헐벗은 일꾼들이

물 말아 도시락을 비우고

둘러앉아 몸을 녹이는

모닥불만도 못한 시여, 부끄럽구나

엘리어트가 어떠니 라캉이 어쩌니

우쭐우쭐 떠들어대면서

목판의 엿 한 가락만도

못한 시를 쓰는가, 시인이여

고구마로 한겨울

끼니 이어가는 아우에게

시인이라고 자랑할 것인가

흙을 등지고, 땀을 죽이고

먹고 낮잠 자는

외래어의 시를 쓴다는 것

부끄럽구나, 또 부끄럽구나

-조재훈, ‘죄의 시’

자본과 권력이 협잡하며 사람들의 영혼을 갉아먹는 이런 시대에 가벼운 일상을 끄적거리는 나의 시는 얼마나 졸렬하고 하찮으며, 또한 나의 삶의 통증은 지푸라기처럼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쉽게 살지 마라 뜻대로 살면 손해라느니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심지心志를 꺾고

대충대충 잔머리에 눈치 보고 살지 마라

가슴에 와닿지 않은 것을 머리로 쓰지 마라

쓰는 일은 사는 일이니 피상에 머물지 말고

쓰잘데없이 함부로 말장난을 일삼지 마라

헛된 이름과 진정 없는 박수에 목매지 말고

칼을 갈듯 칼끝을 목표에 날카롭게 겨누듯

칼날을 벼리는 무뚝뚝한 숫돌의 견딤처럼

말과 뜻의 핵심을 골라 시의 심장을 도려내라

언제 도질지 모르는 병을 위해 매일 약을 먹는

병든 이들의 마지막 아침의 기도를 상상하라

반짝이고 빛나는 것이 번득인다 하더라도

몸소 체로 쳐 체득하지 않은 것은 모두 가짜다

여리게 날숨을 뱉고 들숨을 깊숙이 받들어야

밟혀도 살아나는 징한 목숨이 되는 것처럼

흔들리며 꼿꼿한 양심을 단련하는 시인이라면

번뇌 고갱이를 고르고 걸러 단 한 편의 시를 써라

- 전종호, ‘시인이라면’

(전종호, 시인, 시짐, 어머니는 이제 국수를 먹지 않는다)

저작권자 ⓒ 중앙교육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