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의 철학, 노자 도덕경 산책(43)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2.16 07:52 의견 0

명절에 가족이 모여 즐겁다가 이내 곧 흩어지니 아쉬움이 크다. 아이들 일정 탓에 아침 일찍 진주역에 갔다. 지금이 마침 정치의 계절이라 가는 길목마다 현수막이 즐비하다. 한결같은 내용은 정치를 하는 자들의 호언장담이거나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다. 국민들이 저 정도 현수막에도 판단이 흐려질 것이라는 아주 얄팍한 계산이 깔린 내용을 보며 은근히 화도 나고 더불어 우리의 수준이 아직 저 수준이라는 것에 자조의 마음도 생긴다.

『장자』중에서 ‘도척盜跖’을 읽다 보면 정치하는 자들의 농간弄奸은 시대를 막론하고 다름이 없는 모양이다. ‘도척’은 당시 큰 도적의 이름인데 『장자』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도척’은 9천 명의 졸개를 거느리고 천하에 횡행하면서 제후들의 영토를 침략하고 포악한 행동을 일삼으며, 남의 집에 구멍을 뚫어 문지도리를 떼어내고 들어가 남의 소나 말을 떼로 몰아 훔쳐내며, 남의 부녀를 납치 탈취하며, 도적질 하여 얻는 이득을 탐하느라 친척도 잊고 부모형제도 돌보지 않았고, 조상들에게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장자』도척盜跖>

이 말이 내게는 틀림없이 ‘장자’의 목소리로 들린다.

그런데 그 ‘도척’이 가장 싫어하고 저주하는 부류가 정치하는 사람들이니……심지어 ‘공자’(물론 우리가 아는 금성옥진 공자님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되는......)를 따르는 무리에게 ‘공자’를 이렇게 폄하한다. 사실 이 또한 ‘장자’의 목소리가 틀림없지만……

‘(공자) 너는 말을 만들고 이야기를 지어내어, 함부로 문왕文王이다 무왕武王이다 하며 칭송하고, 머리에는 나뭇가지처럼 장식이 많은 갓(冠)을 쓰고, 허리에는 죽은 소의 옆구리 뱃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를 차고 다니면서, 수다스레 잘못 투성이의 류설謬說을 지껄여대고, 농사짓지 않으면서 밥 먹고, 베를 짤 줄도 모르면서 옷을 입고 다닌다. 게다가 입술을 놀리고 혀를 움직이면서 제멋대로 선악시비善惡是非의 기준을 만들어 천하의 군주들을 미혹시킨다. 그리하여 천하에서 학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면서, 함부로 효孝니 제悌니 하는 덕목을 만들어 놓아 제후에 봉해지고 부귀하게 되는 요행을 바라게 하는 자이다. 그러니 너의 죄는 커서 무겁게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장자』도척盜跖>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다가 ‘장자’는 ‘무족無足’과 ‘지화知和’라는 가공의 인물을 통해 정치를 빌미로 명성을 높이고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무리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들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무족’과 ‘지화’라는 이름은 ‘노자’ 『도덕경』에 있는 이야기를 의인화한 것이다.

“화막대어부지족禍莫大於不知足” <도덕경 46장>

즉 “재앙은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라고 한 내용을 ‘무족’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 성향을 잘 나타내는 ‘무족’은 '지화'를 비아냥거리며 이렇게 질문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명성을 좇고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 ~ 이제 그대(‘지화’)만이 유독 이런 명리名利에 전연 뜻이 없으니, 지知가 부족한(좀 모자란) 것인가?”

이 말에 대답하는 ‘지화知和’ 역시 『도덕경』 내용을 의인화한 것이다.

“화왈상和曰常지화왈명知和曰明”

“조화로움은 일정함이요, 이 조화로움을 아는 것은 밝음이다.”<도덕경 55장>

여기서 조화는 곧 마음의 평정이요 정신적으로 평화로운 상태를 뜻한다.

‘지화’는 ‘무족’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모자람 없이 평탄하게 균형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고, 너무 많아서 남아도는 것이 해가 되는 것은 모든 사물이 대부분 그러한데, 그 가운데서도 재물의 경우가 제일 심하다.”

‘장자’의 의중은 ‘도척’을 통해, 그리고 ‘지화’를 통해 충분히 우리에게 전해진다.

다시 현수막 이야기다. 현수막에 있는 내용으로만 본다면, 선거가 끝나고 (여, 야 누가 이기거나 지거나 관계없이) 현수막 대로라면 우리는 어쩌면 지상낙원에 살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많은 선거를 치렀고 그 결과는 늘 참담했으며, 여전히 각자도생으로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 그런데 저들은 ‘날조捏造’, 그리고 더 나아가 ‘협박脅迫’과 비슷한 말을 현수막으로 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고 있자니 아이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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