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독서 출판 칼럼

공허해진 삶을 치유하기 위한 유일한 처방이 서사?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3.10.01 07:31 | 최종 수정 2023.10.01 09:21 의견 0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animal narrans)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텔링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서사의 위기』(다산초당)의 저자인 한병철은 “가치 창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소비자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약속하는 서사”라고 말한다.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사람들은 사물 자체보다 서사를 더 많이 소비한다. 서사의 내용이 실제 사용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 스토리텔링은 어떤 장소의 특별한 이야기마저 상업화한다. 그러한 이야기는 그 장소에서 생산되는 상품에 서사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상업적으로 최대한 사용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이야기는 공동체에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그 공동체를 형성해 나간다. 반면 스토리텔링은 이야기를 상품으로 만들 뿐이다.”

“이제 정치인들도 이야기가 팔린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서사는 정치적으로 도구화된다. 지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한다”고 말했다. 이재명 대표의 영장이 기각되자 일부 방송 출연자들은 한동훈과 비명계가 결국 이재명의 서사만 만들어줬다고 주장했다. 고난의 서사인가? 방송 출연자들의 지적대로 이재명 대표는 이제 날개를 달았을까? 그건 장담할 수 없지만 분위기가 확 달라지고 반전의 계기를 만든 것만은 분명하다. 서사가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라는 점에서 방송 출연자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작은딸은 올해 4월 중순부터 한 온라인 매체에 격주로 서평을 올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개 매체에 글을 올리니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첫 번째 원고를 송고하기 전에 카톡으로 미리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잘 썼으니 그냥 보내라고 말했다. 두 달쯤 지나서 발표한 서평을 읽고서 나는 처음으로 조언이란 걸 해줬다. “자기 서사가 있으니 이번 글은 재미가 더 있더구나!”라고. 이후 글은 더 재미가 있어졌다. 최근에 한 후배와의 술자리에서 내 딸이 쓴 글이라고 자랑을 했더니 후배는 “이 글은 서평이 아니라 칼럼인데요.”라고 말했다.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저자는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은,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르는 척한다. 소통 소음과 정보 소음은 삶이 불안한 공허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위기는 ‘사느냐, 이야기하느냐’가 아닌 ‘사느냐, 게시하느냐’가 된 데 있다. 셀카 중독마저도 나르시시즘 때문이 아니다.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에게는 안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의미 제공이 결여되어 있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한 ‘나’는 스스로를 영구히 생산해 낸다. 셀카는 텅 빈 자기의 복제”라고 했다.

자, 공허해진 삶을 치유하기 위한 유일한 처방이 서사인 시대에 우리는 자신의 서사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그것이 바로 큰 숙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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