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운, 전 청와대 경호처 검식관
프롤로그
지혜와 변화를 기대했던 2025년 ‘푸른뱀’의 해 을사년이 지나갔다. 아쉬움과 희망을 동시에 안은 채 둥근 해는 주인 없던 청와대 관저의 서쪽 하늘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때 멀리서 바라보는 청와대 영빈관의 야경이 떠오르는 것은 다양한 꽃들이 서른한 번을 피고 지고, 내가 그들을 외면한 지 또 10년이 흘렀는데도 나에게 그곳은 흔적이 남아있는 화석 같은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3년간 국민에게 개방되면서 대통령이 거닐던 상춘재 계곡이 방치된 모습, 나랏일에 고뇌하던 집무실 창가가 먼지에 쌓인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나는 현대판 기미 상궁인 대통령 검식관이었다. 처음에는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으로 입사하였다. 1985년 내가 처음 청와대에 입성할 때는 장세동 경호실장이 면접을 보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있었다. 2016년 떠날 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있었고 박흥렬 경호실장에게 마지막 경례를 올렸다. 5년마다 그 주인은 바뀌었고 일곱 명의 대통령과 열 한 명의 경호실장(처장), 서른한 번의 설을 맞았다.
이제 2026년 병오년이 나와 함께 열정의 ‘붉은 말’로 달리기 시작했다. 청와대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공간이다. 새롭게 열리는 청와대 시대를 보면서 이를 계기로 지금은 터로만 남아있는 구 본관 안에서 근무를 하였던 경호관으로서의 회고, 새로 올려진 현재 본관 인왕실 오찬 행사 시 바쁘게 식사 준비를 했던 검식관, 현대판 기미 상궁으로서의 추억 등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곳에서 근무했던 직원으로서 바라본 청와대와 대통령에 대하여 또한 일원으로서 쌓아온 검식 업무와 경호 활동에 대하여 경험을 소개하되 역사적 사실을 소환하여 이해를 도울 것이다. 그 속에는 공백 기간의 변화가 있을지언정 선배들의 발자취를 발판으로 여전히 후배들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글로벌 경호관의 자부심을 이어갈 것을 믿는다. 청와대 이야기를 되뇌려니 180살 녹지원의 노송이 떠오는 일광 앞에서 겸손하게 웃고 있는 듯하다.
1화 : 청와대의 설날
1980년대 후반까지 신정만이 공식 설날이었다가 1989년 구정이 ‘설날’ 공휴일로 부활했다. 1989년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음력설을 ‘설날’로 인정하고 공식 국가 명절로 대우하였으며, 청와대에서 설 명절 인사와 전통 명절임을 강조하였다. 그 이후 1월 1일 업무를 시작하더라도 구정 휴일에 가족들이 만나고 음식을 장만하고 덕담을 하고, 새해를 설계하는 날이 되었다. 대통령도 청와대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통인시장을 찾아 설 물가를 살피기도 하고, 군부대, 양로원을 방문해 땨뜻한 정을 나누었으며, 설 선물을 국민들에게 보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설 연휴에도 독서나 산책 등으로 비교적 조용하게 보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구정 연휴를 이용하여 상안검 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대통령실 경호처도 종무식과 시무식을 통해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다짐하는 절차를 통해 완벽한 경호를 다짐하는 마음을 갖겠지만 경호업무는 공백이 없이 항상 멈추지 않는다. 나의 새해는 대부분 새벽 매운 바람을 가르며 떡국 조찬을 준비하기 위해 관저로 출근하는 발걸음으로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북악산을 등지고 바라보는 일출은 그해 소원을 비는 나만의 명소이다.
세배와 연하장
‘정월 초하루 백관이 근정전에 나아가 조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하, 종친, 외국사신들도 궁중에서 새해에 임금에게 예를 올렸다. 조하를 받은 뒤 임금은 신하들에게 ‘표리(옷감)’ ‘그림’, 과일 등을 하사하며 하례에 답하였다. 새해 인사를 올리는 풍습은 예나 지금이나, 왕과 서민, 청와대나 가정집 모두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청와대에서 대통령들은 어땠을까? 청와대에서는 관저에서 설빔을 차려입고 가족들의 세배를 받기도 하고, 수석·비서관 등 참모진과 서로 맞절하며 새해 인사를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내외가 경무대에서 세배를 받고, 전 전대통령은 청와대에 어린이들을 초대해 세배를 받기도 하였다. 2000년 청와대 관저에서 직원들로부터 세배를 받는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의 모습도 기록 사진으로 남아있다. 대통령실 직원들로부터 세배를 받고 세뱃돈을 나눠 주기도 하였다. 새해를 맞이하여 청와대 관저 검식관으로 근무를 하면서 청와대 식구들이 대통령께 세배를 드리는 모습을 지켜본 적은 있지만 아쉽게도 대통령의 세뱃돈을 직접 받지는 못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겐 봉투에 넣은 백만 원을 받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현금 만 원을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선배의 말을 기억한다. 새해를 맞이하여 청와대 직원들도 대통령 내외분에게 매년 연하장을 받았다. 나도 지금 보면 소중한 그 연하장을 어디에 두었는지 몇 장 밖에 찾을 수 없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세월이 흘러도 붓글씨로 쓴 사자성어로 연하장을 보내 주었다. 2000년에 집 주소로 보내 준 붓글씨 ‘천상운집’인데 온갖 복된 일들이 구름처럼 몰려오기를 바랐으니, 나 또한 경호관으로 소임을 다했던 백담사에서의 연을 잊을 수 없다. 어느 날 ‘전두환 회고록’을 우편으로 받은 이 후 연하장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