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이부자리로 파고드는 듯한 빗소리에 어수선한 동지가 지나갔다. 오늘부터 새로운 날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전 같으면 차례를 지내고 찹쌀로 빚은 새하얀 새알심이 담긴 팥죽을 먹었을 텐데 이제는 기억 속에나 있는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낮의 길이는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고 매일 매일 어제보다 내일이 밝은 날이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달력을 도두보는 것은 '새로운 날'에 대한 기대와 '지나간 날'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하기 때문이리라.
꼭 25년 전 새 ‘즈믄(밀레니엄)’이 시작될 때 온 세상이 요란했다. 심지어 아이의 출산을 미룰 만큼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가 부풀었다. 그 후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 세상은 어떠한가? 새 천년 출생아들이 25세의 어엿한 청년이 되었지만 우리들 세상은 자연 파괴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몸살을 앓고 있지 않은가! 50년 후엔 우리나라의 겨울이 고작 12일에 불과할 것이라 한다. 반면 여름은 7달이 넘고 혹독한 더위와 해수면 상승 등 인류는 자연재해에 의한 미증유의 고통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인(仁), 애(愛), 자비(慈悲) 등 철학의 부재로 이념적 대립과 갈등의 골은 깊고 ‘쳇GPT’ ‘AI’로 대변되는 새로운 과학과 기술은 자연의 질서 회복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알 수 없어 인류의 미래를 더욱 불확실하게 한다.
이응우 작 _아홉개의 돌탑_ 2025 - 계룡산 연천봉 아래 박성환 명창의 소리청 앞
이응우 작 테마가미에 세운 _아홉개의 돌탑_ 2025
암울한 현실을 반영하듯 아침 7시가 지났는데도 불을 켜지 않으면 사물 인식이 어려울 만큼 실내가 칙칙하고 어둡다. 앞으로 한동안 우리는 움츠린 채 냉랭한 터널을 지나가야 한다. 어스름한 침실 모퉁이 라디오가 "최근 국회 '무제한 토론'에서 새로운 기록이 나왔다."라고 전한다. 이어 한쪽에서는 “대단한 일이다.”, 다른 편에서는 “불필요한 정열의 낭비다.” 그의 지역구에서는 “우리 동네 대단한 인물이 나왔다.” 등등 평가도 분분하다. 한 정당 대표가 24시간 동안 마라톤 토론을 진행한 것이다. 법정 제한이 없었으면 어찌했을까? 정말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토론 중 식사와 용변은? 휴식 시간은? 같이 참여한 사람들의 수면과 휴식은? 생각할수록 궁금한 것이 많아진다. 본래 '필리버스터'라는 토론의 한 방식은 생산적 목표를 갖기보다는 다수의 논리에 저항하기 위해 소수 의견을 최대한 길게 진행해 법안처리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 의회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고성과 삿대질이 오갔을망정 폭력적 방법을 피한 극한의 대립 중 하나다.
답답한 나랏일은 그렇고, 사적으로 지난해를 돌아보면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보다 손녀가 태어난 것이다. 옛날부터 '가유삼성(家有三聲)'이라고 했다. 이 세 가지 소리는 '글 읽는 소리(공부)', '베 짜는 소리(근로)', '아기 우는 소리(대 이음)'를 뜻한다. 딸이 태어난 것이 아시안게임이 개최된 1986년이었으니 실로 40년 만에 아이 울음소리가 집안에 퍼진 것이다. 우리는 저 아이가 이 지구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이 불확실한 세상이 우리에게 지워준 책임과 의무다. 그 밖에도 캐나다 작가와 협력한 '백두대간 프로젝트'를 공주와 캐나다의 테마가미(Temagami)를 오가며 6, 7월 진행했고 9월엔 '세계예술유목(GNAP)' 참가로 한 달 동안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을 다녀왔다.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작업실에 머무르며 나름으로 열심히 생활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처음으로 무릎이 시큰거림과 손 저림, 혈관 나이가 70대로 나온 건강검진 결과 등 신체 건강에 있어 부정적 신호도 있었다.
내년은 '병오년(丙午年)' 말의 해다. 그것도 잘 달리는 적토마라 하니 일과 건강 모두 어려움 없이 계획대로 '탄탄대로'를 달려 나가면 좋겠다. 아울러 나랏일도 '분쟁과 갈등'을 잠재우고 '능률과 실질'을 향해 나아가길 간절히 소망한다. 지난 한 해 정치권에서 불거진 일로 우리나라가 입은 손실이 얼마나 큰지 최대한 빨리 깨닫고 수습하는 길을 선택하길 바란다. '한류'로 대변되는 한민족의 문화적 역량은 이미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다. 인제 그만 정쟁을 멈추고 상생의 길로 가야 할 때다. 올바른 정치로 국민의 역량을 결집하고 증폭시켜 나라의 획기적 발전을 견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양태는 정치가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그 피로감은 임계점에 다다른 상태다. 우리의 '정치(政治)'만 '정치(正置)'할 수 있으면 대한민국은 바로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될 것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새해는 적토마가 광야를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가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 온 누리에 자유와 평등 평화와 번영의 빛이 가득하길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