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과 호수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하자 커피향이 너무 좋다며 딸이 커피 한잔을 시켰다. 한 잔에 3500페소라고 해서 4000페소를 내주었다. 직원이 잔돈이 없다며 1000페소짜리 건빵 한 봉지를 싸게 준다며 500페소 대신 내주는 코미디 같은 웃지 못할 일이 생겼다. 여행이란 다른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때로는 황당할 때도 있지만 그대로 현지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비행기는 산티아고 공항에서 출발 푸에르토몬토 공항을 경유해서 푸에르토나탈레스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다. 푸에르트몬토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에서 내리고 오르는 승객들을 위해 우리는 꼼짝없이 기내에서 1시간 정도 머물러 있어야 한다. 오래전 대전역에 기차가 정차하면 승객들이 내리고 다시 승객들이 오르는 동안 사람들이 잠깐 역 밖으로 나와 사 먹던 가락국수를 떠오르게 했다.

사실 대전역의 가락국수가 유명했던 것은 가락국수의 맛보다 대전역에 기차가 머무는 동안 서울에서 출발한 손님들이 출출한 속을 달래줬던 가락국수와 그 몇 분이 가지는 낭만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비행기에 갇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푸에르토몬토 공항에는 발자국 하나 찍지 못하고 다시 날아서 푸에르토나탈레스 공항에 내렸다. 우리나라와 정반대가 되는 지구의 남반부라 3월 중순이지만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공항을 빙 둘러싼 바다와 멀리 보이는 설산이 우리를 반긴다. 바다 바로 옆으로 난 활주로에 비행기가 내리자 노랗고 하얀 야생화가 바람에 두 손을 흔들며 환영해 주는 모습이 보였다.


도시는 파타고니아 지역의 건축 규제로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어 평안한 느낌을 주었다. 숙소의 객실도 아담하고 조용하게 쉬고 싶은 마을들이다. 이곳에서 10일쯤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마음에 끌리는 마을을 종종 만나기도 한다. 네팔의 포카라가 그랬다. 히말라야가 바라보이는 페와 호수 둘레를 걸으며 일주일쯤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나일강에 떠있는 크루즈를 타고 사나흘 다녀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고 보니 여행을 다닐 때와는 달리 쉬고 싶을 때는 조용한 곳을 선호하는 나의 취향을 알 수 있었다. 숙소에 들어서니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혹등고래 꼬리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 오기 얼마 전 출간한 시집 [고래, 겹의 사생활]에 나오는 고래는 혹등고래를 생각하며 써낸 시였다. 바다 한가운데서 분수처럼 물을 뿜어내며 존재를 알리고 하트모양의 꼬리를 펼쳐 보이며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혹등고래는 상상만으로도 매혹적이다. 일정상 이번 여행에서는 만날 수 없다. 그러나 꼭 한번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 김양숙, 1990년『문학과 의식』시 등단, 2025년 탄리문학상 수상, 2024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활동비 수혜, 2017년 [시와산문 작품상] 수상, 2013년 부천문화예술발전기금수혜. 2009년 [한국시인상] 수상, 시집 『종이 사막』,『지금은 뼈를 세는 중이다』,『기둥서방 길들이기』,『흉터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유』,『고래, 겹의 사생활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