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교육칼럼니스트, 전 인천 산곡남중 교장)
이제 곧 2025년의 장을 넘기며 우리는 다시 교육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변화의 속도는 한층 빨라졌지만, 그 속도가 반드시 방향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AI 교과서 채택과 고교학점제 등의 정책은 수차례 조정되었고, 각종 개혁안이 쏟아졌지만 교육의 심장부인 교실과 학생의 삶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근원적 질문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 올 한 해, 우리 교육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움직였는가?
2025년은 교육계의 구조적 불안정성이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드러난 해였다. 입시제도 개편 논의는 사회적 합의 없이 소모적 논쟁으로 이어졌고, 학교는 교사의 행정적 부담과 평가 업무에 휩싸인 채 교육의 본질적 역할에 충분히 집중하지 못했다. 교사들은 변화하는 정책에 적응하느라 지쳤고, 학생들은 기대보다 압박을 더 많이 체감했다. 정책이 거듭 변해도, 현장에서 체감되는 변화는 더디기만 했다. 이는 정책의 목표와 실제 구현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깊은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교육은 움직이고 있으나, 교육다운 움직임은 여전히 확보되지 못한 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올해 특히 교육계의 화두는 ‘AI 시대의 배움’이었다. 지능형 튜터, 학습 데이터 기반 맞춤 교육, 자동화된 피드백 시스템…. 기술은 분명 교육의 풍경을 빠르게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멈출 수 없는 성찰이 요구된다. 기술의 확산이 곧 배움의 확장으로 이어지는가? AI는 정교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학생 내부의 동기와 호기심을 일으키는 일, 불완전함을 견디며 배우는 과정, 타인의 생각과 충돌하며 자라나는 지성은 기술로 대체될 수 없다.
오히려 기술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학습을 관리하려는 유혹을 강화할 위험도 있다. 배움의 가장 중요한 요소—사유, 상상, 관계—는 기계적 계산이 아니라 인간적 경험 속에서 비로소 발생한다. 우리가 기술을 활용하는 목적이 학생을 ‘측정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면, 그것은 교육의 축소이다. 기술이 학생을 더욱 자유롭게 사고하고 배우도록 돕는 데 사용될 때 비로소 그것은 교육의 진보가 될 것이다.
2025년은 또한 경쟁 중심의 오래된 교육문화가 여전히 견고함을 드러낸 해였다. 많은 학생은 실패를 배움의 일부가 아니라 낙오의 신호로 받아들였고, 학교는 다양한 가능성을 키우기보다 성적과 결과를 중심으로 학생의 삶을 재단했다. 그러나 미래는 정답을 빠르게 찾는 인간이 아니라, 정답이 없는 문제를 정의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인간, 서로 다른 관점을 연결하며 협력할 줄 아는 인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학생들에게 질문보다 정답을, 탐구보다 성취를, 과정보다 결과를 더 강하게 요구해왔다. 이 괴리는 교육의 가장 근본적 개혁이 여전히 ‘문화의 변화’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2025년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새로운 슬로건이나 또 다른 정책이 아니다. 교육의 본령(本領), 즉 ‘배움이 인간을 성장시키는 과정’이라는 가장 오래된 진실이다. 학생은 시험 점수의 집합이 아니라 세계를 탐구하는 존재이며, 교사는 정해진 지식을 전달하는 관리자가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촉발시키는 안내자여야 한다. 학교는 선별의 장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이 만나 민주적 감수성과 공동체적 책임을 배우는 작은 사회여야 한다. 이 본질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제도 개편도 결국 표피적 변화에 머물 것이다.
2026년의 문턱에서 교육은 새로운 선언보다 더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세계를 준비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세계에서 학생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이 질문에 진지하고 정직하게 답하려는 노력 속에서만 교육의 미래가 열릴 것이다. 2025년을 떠나보내는 지금, 우리는 다시 중심을 향해야 한다. 교육의 중심이 인간에게 있고, 배움의 중심이 성장에 있으며, 학교의 중심이 가능성에 있다는 오래된 진실로 말이다. 그 진실을 되찾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해를 맞는 우리 교육의 가장 중요한 첫걸음일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