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호박으로 식초를 양껏 만들고도 남아 조청을 만들기로 했다. 작물들이 폭풍 성장할 때 우리가 먹고도 남았지만 버리는 것 일체 없이 우리 닭들이 잘 먹어주었다. 무청도 닭들과 반띵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 닭들은 늙은 호박을 먹을 줄 모른다. 이웃집 닭들은 호박을 수박 먹듯 잘 먹는다는데 말이다. 쥐어박을 수도 없고 궁리 끝에 나온 것이 호박 조청 만들기다.
베보자기를 만들고 재료 준비를 마친 후 오랜만에 아는 선생님을 만났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조청 이야기를 했다. 그는 대뜸 “만들어 보셨어?” 물었고 “아니”라고 말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런데 조청을? 왜?” 재차 물음에 “늙은 호박이 남았어”라고 말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남이 준 작물은 버려도 자신이 키운 작물은 절대 못 버린다는데 그 말이 정말 맞네” 한다. 듣고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조청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를 다른 사람을 통해 확인받은 셈이다. 호박죽을 두고두고 끓여 먹으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역시 만들어 보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고, 또 호박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두고두고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조청을 만들면 남은 것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고 또 오래 저장할 수 있으니 무조건 고한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에 해당한 일이었다. 더구나 요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요, 그 간단하다는 식혜도 만들어 보지 않은 내가 한 짓이니 몰라서 낸 용기였다. 그러나 ‘아는 것이 병’이라 위축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식해서 용감’해진 것이 결론적으로 나았다.
하필이면 조청 만들기 하루 전날, 집 앞 빙판에서 미끄러져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내 몸놀림이 부자연스럽게 됐지만 미루지 않고 점심 약속이 잡힌 남편과 이른 아침부터 시작했다. “이렇게 짜라”, “저기에 부어라” 머릿속에서 비디오는 돌아가고 레시피는 입에서 나왔다. 삶은 호박과 찹쌀밥, 엿기름 삭힌 것을 베주머니에 짜니 맑은 물이 큰 냄비에 가득 찼다. 약한 불에서 더디게 끓여지는 맑은 물을 보며 ‘이게 끈적한 조청이 된다고?’ 반신반의했다. 절반으로 줄어들고 나서야 나는 의심을 거두었다. 외출한 남편에게 가래떡을 사오라고 전화하고,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오셔서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 먹자고 마을 단톡방에 문자를 올렸다. 마을 주민 여섯 분과 좋은 시간을 함께 했다. 모르긴 몰라도 마을 주민들도 진짜 조청을 먹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면서 오시지 않았을까? 우리 마을 장로님께서 맛있게 많이 드시는 것을 보니 초대가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꿀을 의미하는 한자 밀(蜜)이 있지만 청(淸)은 꿀의 성질(맑음)을 표현하는 한자다. 성경에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는 석청은 꿀을 의미한다.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바위 틈이나 동굴 등에 벌이 집을 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데 원문에도 야생꿀(wild honey)로 나온다. 고대 중국에서는 꿀(蜜)과 청(淸)을 혼용해서 쓰는 경우가 많았기에 한자 문화권에 있는 우리 선조들이 이에 영향을 받아 야생꿀을 석청으로 번역한 것이라 한다. 오늘날에는 양봉(養蜂)하여 가공하지 않은 것은 꿀이라 하고, 과일을 설탕에 절여 꿀과 같은 성질의 맑은 액체로 가공한 것에는 청(淸)을 붙여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블루베리청(淸), 매실청(淸) 등이 이에 해당되는 예이며 조청(造淸) 역시 곡식을 삭히고 고아서 꿀과 같은 맑은 성질을 가진 것으로 후대에 붙인 한자어다. 즉 ‘사람이 가공해서 만든 인공꿀’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조청(造淸)은 잉여 식량을 썩히지 않기 위한 고민에서 혹은 자연환경의 한계로 시작된 건조나 발효와 같은 저장 기술이다.
요즘에는 물자를 흔하고 쉽게 구할 수 있어 나는 찹쌀을 이용했지만 쌀이 귀한 시절에는 싸라기를 이용해 만들었다. 호박조청을 조금 더 고아서 만든 것이 호박엿이고 호박엿은 오징어와 함께 울릉도의 상징이다. 옛날 울릉도는 땅이 척박하고 바람이 세서 쌀농사는 거의 되지 않고,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호박과 옥수수가 곡식을 대신했다고 한다. 죽을 쒀서 식량을 대체했지만 그래도 남는 호박이 많아 보관이 큰 문제였다. 늙은 호박과 옥수수, 엿기름으로 만든 조청과 호박엿은 척박한 섬 울등도에서 춥고 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식량이 되고 오늘날 식사대용으로 먹는 에너지바(energy bar) 같은 게 아니었을까? 울릉도 호박엿에 대한 전설도 있다.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과년한 처녀가 육지로 시집갈 날을 받아놓고 호박범벅을 끊이고 있었다. 자신이 시집을 가버리면 혼자 살아갈 아버지를 생각하며 울다가 졸다가 호박범벅이 너무 많이 끓어서 졸아들어 버렸고 이것이 굳어져 호박엿이 됐다고 전해진다.
조청을 만들기 위해 자료 검색을 하다가 나무 위키(namu.wiki)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읽었다. ‘조청은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린다는 것과 연료 소모, 재료 값 등에 비하면 매우 적은 양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한나절 꼬박 졸여야 하니 보통 노인들이 만든다. 장작으로 불을 때서 요리하는 옛날식 부엌이 아니라면, 가스비 고지서 받고 뒷목 짚을 각오는 하자. 이걸 만들 줄 안다면 어지간한 양반가 음식은 만들 줄 안다고 보면 된다.’ 내가 주목한 것은 ‘보통 노인들이 만든다’이다. 왜 굳이 노인들이 만든다고 했을까? 한나절 꼬박 졸여야 하니 단순히 시간적 여유가 많은 사람이 곧 노인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시간적 여유뿐만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계량할 수 없는 감각적인 판단, 즉 경험이 쌓인 노련함이 핵심인 것에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실제 만들면서 ‘주걱을 들어 올려 접시에 떨어뜨려 보았을 때 이 정도로 흐르면 된다’라는 수치화(數値化) 되지 않은 설명에 당혹했다. 수십 번 접시에 떨어 뜨리고 흘려 보았다. 각 세대는 각자의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를 잠언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젊은 자의 영화(榮華)는 그 힘이요 노인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라’(잠 20:29) 디지털 시대의 행진에서는 얻기 어려운 시간이 겹으로 쌓인 경험과 감각적 지혜는 백발만의 아름다움이리라. 나라에서 주는 시니어 카드도 받았는데 괜스레 ‘노인’ 이라는 단어 하나에 심드렁해지니 나는 이미 확실한 노인이다. 맑은 단물이 얕은 불에서 오랜 시간 고아져 끈적한 조청이 되는 것이 나는 그저 놀랍고 신기했다. 한 냄비 가득한 맑은 물이 바닥 가까이 졸아서 허무할 만큼 적은 양의 조청이 된 것을 보면 조청에게 성이 있다면 허씨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가마솥이 주어지는 환경이 된다면 서슴없이 노인을 자처하고 다시 용기를 내볼 것 같다.(글 얼치기 농부 김상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