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소녀

아르띠예리아 언덕의 벽화



와인 맛을 모르는 우리 모녀는 다음날 일정인 와이너리 체험일정을 신청하지 않았었다. 그 대신 아침 숙소에서 천천히 일어나 쇼핑이나 하자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와이너리 일정을 마치고 모아이 석상이 있는 발파라이소로 간다는 말에 저녁 늦게 와이너리 일정을 신청했다.

제주도 돌하르방처럼 돌로 만들어진 석상이라는 이유 하나로 모아이 석상에 관심이 있던 나는 칠레 본토에서 3700Km나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 있는 이스터 섬 그곳에 왜 석상이 있는지 그리고 모아이 석상이 왜 이곳 비냐 델 마르에 있는지 궁금했다. 아침 발파라이소로 출발하는 버스에 올랐다. 와이너리는 백포도주의 고장 카사블랑카 계곡에 있었다. 194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 어린 시절 ‘달빛을 머금은 에메랄드’라고 표현했던 포도밭들이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포도밭의 규모는 우리나라에서 보던 포도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넓었다. 와이너리 입구에 있는 포도밭 사이로 들어가 달빛을 머금은 에메랄드라고 표현했던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를 생각하며 포도를 따 먹었다. 새콤달콤한 맛이었다. 와이너리 체험으로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백포도주와 적포도주를 마시는 방법 등 설명을 들으며 와인을 종류별로 시음해 볼 수 있었다. 와이너리 일정이 끝나고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발파라이소를 향해 달렸다. 발파라이소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오가는 선박들의 경유지다. "작은 샌프란시스코" 또는 "태평양의 보석"으로 불리는 곳으로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산등성이에 해무가 짙어지는 것을 보면서 "천국의 골짜기"라는 별칭을 가진 발파라이소가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언덕을 오르는 아센소르[푸니쿨라]


도시의 중심인 광장을 둘러보고 난 뒤 발파라이소의 벽화가 그려진 건물과 항구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르띠예리아 언덕으로 가기 위해 아센소르콘셉시온[푸니쿨라]을 타기 위해 건물사이를 걸어가는데 머리가 희끗거리는 한 아주머니가 따라오며 느닷없이 자파니스냐고 물었다. 노 노 코리아라고 대답하자 반가워하며 대뜸 한강 작가에 대해 물었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 나는 일행이 있어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자기가 따라가도 괜찮냐며 따라왔다. 그리고 그분은 한강의 소설에 대해 어떤 부분이 좋으냐고 물었고 나는 한강의 소설은 문장이 시적이어서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분은 프랑스에서 왔으며 파리에선 채식주의자가 인기가 많다고 했다. 승강기 앞까지 따라오다 아센소르 앞에서 아쉬워하며 헤어졌다. 아르띠예리아를 오르내리는 아센소르[푸니쿨라] 승강기는 1883년 나무로 만들어진 한 칸짜리 승강기로 오래되어서 삐걱거리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아센소르에 올라 일행들에게 파리 아주머니 얘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한강 작가로 화제가 돌아갔다. 누구는 아직 한강 소설을 못 읽었다고 하고 또 누구는 어렵다고 했다. 나는 노벨상수상작을 번역 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며 문장이 아름답고 시적이라고 말해주었다. 귀국하면 한 권씩 사서 읽기를 추천드렸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소년이 온다’를 먼저 읽고 그다음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는 게 좋다고 첨언을 했다.

그림으로 말을 걸어오는 아르띠예리아 언덕의 벽화들은 남미의 강렬한 태양 아래 가장 남미다운 색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곳 벽화의 유래는 19세기 유럽에서 건너온 가난한 이민자들이 선박용 철판의 자투리를 주어다 언덕에 집을 짓기 시작했으며 작업하다 남은 페인트를 가져와 벽에 색색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보헤미안 문화의 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발파라이소의 상징적 요소가 되었으며 단순한 벽화가 아니라, 도시의 정체성과 예술적 가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벽화는 군사독재에 직접 대항하는 대신 자신의 의견을 벽에 그림이나 그래피티로 그려 의사표시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발파라이소의 벽화는 이민자들의 삶과 예술적 실험, 그리고 도시 재생의 상징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강렬한 색상으로 칠해진 벽화들은 칠레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주며 남미의 원형적 색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르띠예리아 언덕의 골목 풍경


* 김양숙, 1990년『문학과 의식』시 등단, 2025년 탄리문학상 수상, 2024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활동비 수혜, 2017년 [시와산문 작품상] 수상, 2013년 부천문화예술발전기금수혜. 2009년 [한국시인상] 수상, 시집 『종이 사막』,『지금은 뼈를 세는 중이다』,『기둥서방 길들이기』,『흉터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유』,『고래, 겹의 사생활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