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하 만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백제 장군 백가는 우연히 마주친 굿판에서 자신이 왕이 되리라는 무당의 예언을 듣고 야심에 불이 붙는다. 망설이면서도 아내의 부추김에 이끌려 동성왕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다. 후한을 없애고자 왕의 측근과 가족까지 죽이지만, 불안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백가 부인도 양심의 가책으로 몽유병자가 되어 자살한다. 다시 무당을 찾는 백가. “차령의 밤나무숲이 움직이지 않는 한, 땅을 딛고 태어난 자는 결코 백가를 해칠 수 없다”는 공수를 받고 안도하는 것도 잠시. 백가의 손에 처자식을 잃은 해명의 진압군이 쳐들어온다. 밤나무숲이 움직인다. 끝까지 저항하는 백가에게 해명이 말한다. 나는 땅이 아니라 바다 위에서 태어났다고. 백가는 마침내 해명의 칼에 쓰러진다.
어디서 많이 본 스토리가 아닌가? “왕이 되실 분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오는 길에마녀로부터 왕좌에 오를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 맥베스가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이야기가 아닌가? 아마도 그의 귓가에 탐욕의 달콤한 속삭임을 불어넣는 아내의 부추김과, 정의와 야망 사이에서 고뇌하던 맥베스가 결국 왕좌를 차지한 후에 일어나는, 예언이 부른 욕망, 탐욕으로 물든 비극을 그린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생이란 한편의 연극
우리는 세상이라는 무대 위의 배우
조명이 꺼지고 막이 내리면
모든 건 한바탕 꿈
허망한 물거품
연기처럼 사라져”
<맥베스- 백가의 난>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원작을 바탕으로 백제 동성왕 시해 사건, ‘백가의 난’으로 각색해 새로운 서사로 재구성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가 1,500년 전 백제의 역사와 만나 한국적 창극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피아노, 아쟁, 타악이 함께하는 라이브 연주와 판소리 특유의 울림, 그리고 중고제의 담백하면서도 단단한 소리가 결합해 강렬한 몰입감을 이끈다. 구체적이고 세밀한 감정선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열연, 충청도굿의 미학을 차용한 무대장치와 '설위설경設位說經'이 극의 긴장감을 더하며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충청도 ‘앉은굿’에서 사용되는 설위설경이 무대 곳곳에 활용되어 인물의 내면세계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며, 차령산맥과 공산성, 금강 등 충청의 자연 풍광이 배경으로 펼쳐진다. 대사 곳곳에 충청도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등장하며, 작품 전반에 지역의 정서가 흘러넘친다. 단순히 지명을 배치하는 수준이 아니라 충청의 역사와 미감을 극 전체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한마디로 이번 창극 속에 충청의 미학이 극대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맥베스>를 원작으로 했고, 원작의 표현을 부분부분 옮겨온 번안극 형식이기 때문에 심리적 갈등을 묘사하는 언어들이 치밀하다. 원만한 극의 구성과 전개가 재미와 감동을 배가시킨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 실패한 영구집권을 위한 친위쿠데타 사건을 연상시키면서 시사성과 함께, 권력과 재물을 추구하다 실패하는 인간 삶의 일반적인 교훈을 준다. 오페라도 아니고 뮤지컬도 아닌 판소리로 전개되는 창극이 주는 남다른 형식을 감동을 더해 준다.
충청의 소리 중고제 명창 박성환 대표가 대본과 연출을 담당했다. 박성환 대표는 중고제 적벽가의 사실상 유일한 전승자로, 국립창극단 부수석을 역임한 창극 전문가다. 강도근·성우향에게 사사한 뒤 30여 편의 창극을 발표해 왔으며, 2013년부터 2023년까지 7차례에 걸친 중고제 적벽가 완창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공연은 공주에서의 초연에 이어 서울 서교스퀘어에서 11월 19일부터 21일까지 이어진다. 시간은 오후 7시 30분. 이 공연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5년 지역예술도약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다.(전종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