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파 앞에선 쪼그려 앉는다. 누렇게 마른 잎을 뽑아내면서 아쉬운 마음 가득하다.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지나가는 이웃에게 여쭤본다. “병들었네, 뿌리에 구더기가 있어, 약을 줘야 해, 가게 가서 말하면 알아서 약을 줘, 쪽파는 키우기 어려워~~” 약이라······. 토양 살충제인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약(살충제)을 뿌리면 구더기는 죽겠지만 흙 속에 있는 많은 지렁이도 죽는 거 아닐까? 따라 해야 할까? 얼치기는 끌탕 중이다.
내 평생 육체적으로 가장 강한 노동을 했던 것이 손바닥만 한 텃밭의 흙 만들기였다. 그야말로 영끌의 노동이었다. 이 노동은 나를 집중적으로 흙과 접촉하게 한 시작이었다. 이듬해 봄부터 뭐라도 심어 보려고 호미를 잡았는데 번번이 돌에 걸렸다. 들어내려다 엉덩방아를 찧기 일쑤다. 보다 못한 펜잡이 남편이 괭이 한 자루를 사서 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흙을 사서 쌓기로 했다. 적은 양의 흙은 살 수도 없어서 결국 흙을 만들기로 했다. 토비 헤맨웨이의 《가이아의 정원》에서 정보를 얻는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원시림 같은 마을 옆 산기슭의 부엽토와 낙엽을 포대에 담아 질질 끌고 내려와 수레로 수없이 날랐다. 여기에 잔디 깎은 것, 숯, 나무껍질, 잔가지, 계분, 톱밥 등등 내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순차적으로 섞어 물을 뿌리고 뒤집기를 반복해서 겨울을 넘기며 썩혀 만든 흙이다. 캐낸 돌들로 유실되지 않도록 돌담도 쌓았다.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그때 나는 선무당이었다.(나는 이때를 ‘선무당’이라 자칭했고, 2년 차인 지금은 ‘얼치기’라 자칭 승격해서 말하고 있다) 이 텃밭에서 무농약과 무 비닐 멀칭이 내 원칙이다. 비닐 멀칭을 하면 땅속 온도가 올라가서 지렁이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텃밭에서 호미질을 하다가 지렁이의 꿈틀거림에 놀랄 때가 많다. 내 호미질에 지렁이들도 놀라긴 피차 마찬가지다. 지렁이를 내가 잡아다 넣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차치하고, 지렁이들이 구더기를 잡아먹을 순 없을까? 생각하지만 아는 것이 없으니 끌탕은 계속된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 누런 잎을 뽑아내고 물 빠짐이 좋도록 이랑을 매만져 주다가 깜짝 놀랐다. 누렇게 말라 버린 잎들을 계속 뽑아내서 휑해진 밭에서 초록 촉이 흙을 뚫고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풀은 아니다. 자세히 둘러보니 올라오는 새잎들이 제법 많다. 종구(쪽파 뿌리 부분의 작은 알뿌리)를 심고 처음 솟아난 것과 비슷하다. 한 개의 종구가 20개까지 분열한다는데, 썩으면서 한 편으론 분열한 종구들의 잎이 흙을 뚫는 것이 분명하다! 흙의 생명력이란 이런 것일까?
얼마 전 ‘흙 살리기 박람회’가 구례에서 열린 것(2025.09.21.)을 뉴스로 읽었다. 흙에 생명력이 있으니 살린다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박람회 주제는 ‘흙이 살아야 지구가 산다’이다. 어떻게 흙을 살릴 수 있는지 궁금해서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 어린이 흙 체험, 건강한 흙으로 만들어진 친환경제품 프리마켓과 푸드트럭도 등장하고 토양오염의 심각성을 알리는 설치물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풍성하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고 지속 가능한 생태계 조성을 위해 추진된 바람직한 잔치이다. 그러나 참석하지 않아서 그런지 기사만으로는 어떻게 흙을 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만족할 만한 것을 얻지 못했다. 내가 아는 흙에 대한 지식은 단순하고 지렁이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다.
도시에 살 때는 비 온 뒤 콘크리트 위에서 꿈틀대는 지렁이를 피해 걸었고 땡볕에 말라비틀어진 채 죽어 있는 지렁이를 흉물 취급했다. 그런 내가 귀촌하면서 지렁이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지렁이가 흙 속에서 굴을 파고 흙을 먹으며 흙똥을 누는데 그 지렁이 똥(분변토) 1g 속에 1억 마리 미생물이 살고 있다고 한다. 또 터널이 생기면서 공기와 물의 흐름을 땅속 깊숙이 전달하게 되면서 토양 생태계 내 미생물 군집을 안정적으로 유지시켜 흙이 썩지 않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지렁이가 많이 살면 흙이 오염되거나 죽어가지는 않는 것이라고 단순히 믿고 있다. 오늘 쪽파의 새로운 촉을 보면서 흙의 생명력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체코의 유명한 작가 카렐 체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에서 ‘진정한 정원가는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한다. 진정한 농부는 흙을 가꾸는(살리는) 사람이 아닐까 빗대어 생각해 본다. 마늘밭을 만들기 위해 사 둔 유기질 비료 어분을 쪽파 주변과 이랑에 조금 뿌렸다. 아침 이슬에 어분이 젖어 흙에 천천히 스미고 쪽파가 잘 자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는 얼치기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정확히는 잘 모른다. 그저 쪽파에게 보내는 내 맘대로의 응원이다.
한 달 뒤 김장을 하고도 남을 만큼의 수확을 거두었다. 고맙다 쪽파야.(글 김상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