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과 가지 말리기는 한로(寒露) 이후에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동호 작가의《어느 고독한 농부의 편지》에서 한로가 되어야만 곡식이 제맛이 들고, 차가운 바람을 쏘여야 단맛이 배어든다고 한다. 호박도 늦게 열리는 것이 더 달고, 말리는 것 역시 곡식과 마찬가지로 한로 지나서 하면 더 좋다고 한다. 날짜에 동그라미를 씌워 놓고 한로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즈음부터 비가 오더니 가을장마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때 내리는 비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비’라고 농부들은 말한다. 벼들은 익어서 고개를 떨군 채 쓰러져 있다. 지난여름, 불과 두 달 전에는 폭염으로 해를 피해 다녔는데 이제 나는 머리 위에 해가 머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인간은 세상 모든 일에 어떤 방식으로든 관여하고, 손쓸 방도를 마련하지만 정말 날씨만은 어쩔 수가 없다!

무려 2주일이나 지속된 가을장마가 끝나자마자 호박과 가지를 말리기 시작했다. 처음하는 일이라 모양이 들쭉날쭉 다양해진다. 가지 꼭지를 자르지 않고 열십자로 쪼개어 빨랫줄에 널기도 하고, 꼭지를 잘라 길고 얇게 자르고 떡국 모양을 만들어 채반에 널기도 한다. 호박은 둥근 모양 한 가지다. 채반과 크고 작은 소쿠리, 김밥 마는 대나무 발과 베 천까지 총출동이다. 비는 멈췄지만 볕의 양이 원하는 만큼이 아니다. 날씨 예보를 전날 확인했건만 조금이라도 실내 조도가 낮아지면 밖을 보고, 급기야 문을 열고 나간다. 봐서 뭘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하늘과 구름을 사방으로 살펴본다. 바람 냄새에서, 구름에서 날씨를 점칠 수 있는 농부도 아니면서 말이다.


가을 투명한 볕과 찬바람에 수분이 제거되면서 영양 성분이 농축되고 거기에 단맛도 입혀 줄 것이다. 나도 제거될 것은 제거되어 농축된 인간, 단맛까지 입혀진 인간으로 변할 수 있기라도 하는 양 잠시 채소 옆에 서 있는다. 등이 따숩다. 채소 옆에서 명상 아닌 명상을 하다가 생각나는 책이 있어 들어와 찾는다. 여든이 가까워진 작가 김훈의 《허송세월》이다. 그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고 한다. ‘젊었을 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나와 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중략>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43쪽) 해에서 폭발하는 빛과 볕에 몸을 맡기고, 깊이 내려앉은 해가 빛과 색을 모두 거두어들이는 노을을 바라보며 쓴 ‘허송세월’이다. 이미 있었으나 알지 못했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들여다 보면서 가득 차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나도 호박과 가지 옆에서 볕바라기를 한다.

잘 마른 호박을 소쿠리에 담고 보니 내 눈에는 마치 꽃을 담은 소쿠리로 보인다. 말린 가지와 호박으로 찬을 만들어 본다. 달큰하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그만이다. 맛에 영양소와 건강까지 더해진다니 일거삼득이다. 내친김에 무말랭이 만드는 방법도 찾아보니 넘사벽이다. 추운 겨울에 무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마르기를 기다려야한다고 한다. 마치 황태 덕장에서 황태를 말리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생무와 무말랭이의 영양성분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 생무는 90% 이상이 수분이지만 무말랭이는 마르는 과정에서 공기 중의 많은 미네랄과 결합하여 화학반응을 일으킨다고 한다. 이 같은 건조원리 때문인지 한방에서는 무말랭이가 인삼보다 좋고 심지어 산삼에 견줄만하다는 견해까지 있다. 온풍기의 따뜻한 바람으로 무말랭이를 말리면 수분이 빠져나오면서 무에 있는 영양소까지 다 빠져 나온다고 하니 자연 건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고창 선운사에 갔었다. 산사 장독대 뚜껑 위에서 묵과 채소, 얇게 썰어진 찐 고구마가 말려지고 있었다. 찐 고구마 하나를 몰래 집어 먹고 맛있어서 더 집어 먹었었다. 절 근처 식당에서 말린 묵 볶음을 처음 먹어 보았는데, 오늘 저녁에 말린 채소볶음을 먹으면서 그때가 떠 올랐다. 가을의 투명한 빛과 볕 속에 산사는 온전히 잠겨 있었고 청춘도 시간 속에 잠겨 있다.(글 김상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