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전 지수중학교 교장)
지혜는 사전적으로 사물이나 사태의 상황을 빠르게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정신적 능력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선과 악’의 개념이 거의 없다. 즉 지혜는 선과 악, 어디에도 쓰이는 말이지만 상식적으로 선한 것으로 인식된다. 이를테면 ‘올바른’이나 ‘신중함’ 등의 단어와 함께 써서 선한 것으로 그 범위를 제한한다.
라틴어로 지혜는 ‘sapientia’인데 현생 인류를 일컫는 ‘Homo sapiens’가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영어로는 ‘Wisdom’인데 고 영어에 유래되었다. 의미는 ‘property of being wise’ 즉 현명함의 자산(속성)’쯤으로 풀이될 수 있다. 어원에서도 역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은 매우 모호하다. 단적인 예로 지구 역사에서 현재까지 유지해 온 인류의 현명함을 다만 ‘선과 악’의 기준으로 나누는 것은 매우 어렵다.
지식은 사전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를 말한다. 즉 배움과 실천, 그리고 이해의 작용을 거쳐 나타나게 되는 정신작용이다. 역시 지식의 정의 어디에도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은 없다.
노자께서는 이 점에 주목하여 『도덕경』 5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民多利器, 國家滋昏 人多伎巧, 奇物滋起 法物滋彰, 盜賊多有. (민다리기, 국가자혼 인다기교, 기물자기 법물자창, 도적다유.)” “백성에게 편리한 도구가 많을수록 국가는 혼란이 심해지며 사람들에게 기교가 많을수록 기이한 물건이 많이 생겨나고 진기한 물건이 많을수록 도적은 더욱더 많아진다.”
여기서 말하는 ‘편리한 도구’, ‘기교’ 등이 곧 ‘지혜’나 ‘지식’으로 치환될 수 있는 말이다. 즉 노자께서는 처음부터 매우 부정적으로 ‘지혜’와 ‘지식’을 판단하신 것이다. 노자 당시의 세상 형편에 대해 노자 스스로 지혜와 지식 탓에 혼란에 이르렀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해 놓고 보니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지혜와 지식을 신장시키기 위해 애써온 지난 38년이 돌연 무용해지는 순간이다. 나의 노력과 나의 열정이 아이들에게 다가가 아주 드물겠지만 문제를 일으키고 나아가 혼란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문제는 역시 기준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가르치는 모든 지식에 기준을 부여할 수는 없다. 다만 아이들 스스로 그 기준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배양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지난 세월 부단히 노력하였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그 기준을 잃고 있으며 오히려 기준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조차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철학 교육을 강조해 왔다. 철학이란 인류 역사가 창조해 낸 가장 이상적인 기준들의 복합체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활동에는 기초적으로 모두 철학적 함의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학교 교육에서 조금만 더 철학적 사유를 부가한다면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인류적 측면에서) 건강한 기준을 체화하게 될 것이다. 노자께서도 혼란을 정리할 수 있는 기준을 몇 가지로 정리하셨다. 즉 ‘무위無爲’, ‘호정好靜(고요함)’, ‘무사無事(무사無私와 통함, 사사로움이 없음)‘, ‘무욕無欲’을 그 기준으로 제시하셨는데 이 또한 모두 철학적 사유를 거쳐야만 가능한 태도들이다.
수능이 다가오는 지금,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위無爲’, ‘호정好靜(고요함)’, ‘무사無事(무사無私와 통함, 사사로움이 없음)‘, ‘무욕無欲’을 그 기준으로 제시할 수 있을 만큼인가? 오히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생각이 현재 이 나라의 상황이고 보면 유, 초, 중, 고 아이들에게 참 면목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학교 교실에서 철학적 여유를 제공하는 풍경도 찾아보기 어렵다. 지혜와 지식이 어떤 기준을 가지는가에 따라 인류의 삶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하기도 하고 동시에 생존을 위협하기도 한다.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인류적 관점에서 선한 기준으로 성장하고 그 성장이 다시 선한 기준으로 정립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