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아욱이 봄 아욱보다 더 맛있는 줄 몰랐다. ‘시아버지도 안 드리고 며느리 혼자 먹는다’ , ‘마누라 내쫓고 먹는다’는 말이 전해지니 사실일 것이다. 봄에 아욱을 심어 풍성하게 얻었다. 채종까지 마치고 그 자리에 청갓을 심었는데 아욱 싹 하나가 청갓 귀퉁이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씨 한 알이 자연 발화한 것이다. 아욱을 한 해에 두 번, 봄과 가을에 파종할 수 있는 것도 몰랐다. 꽤 오래전 기사에서 초등학생들이 과일과 채소를 계절에 따라 구분하기를 가장 어려워한다는 내용을 읽었었다. 마트에 가면 사계절 모든 채소와 과일이 있으니 그럴만하지 않겠는가. 요즘은 학교마다 작은 텃밭을 가꾸고 현장 체험도 많이 가니 달라졌겠지만 나 역시 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되돌아 보았다. 조금 더 솔직하자면 상추도 봄에만 심는 것인 줄 알았다. 어느 날 장에 갔다가 가을 상추 씨앗을 보고 사서 심었다. 여름처럼 생육이 왕성하지는 않지만 10월 중순을 넘긴 지금도 모자람 없이 얻고 있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날 저녁에 아욱 된장국을 끓였다. 나는 ‘마누라 내쫓고 먹는다’에 ‘서방 내쫓고 문고리 걸고 먹는다’로 답하고 싶다.
올해부터 얼치기 농부를 자처하면서 가장 강렬하게 와닿은 작물이 아욱이다. 아래는 아욱 채종을 마치고 썼던 농사 일기(25.08.07)다.
언 땅이 풀리기 시작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극한 더위에 세상은 불가마 속이다. ‘극한 더위-극한호우’가 반복되지만 작물은 자라고 내게 넘치도록 풍성하게 안겨 주었다. 아침저녁으로 키를 달리하면서 위풍당당해지고 예쁜 꽃부터 다양한 열매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아까운 모습이다. 손바닥만 한 텃밭도 쉽지만은 않다. 기후 위기를 넘어 재앙적 표현의 불가마, 물폭탄 속에서도 밭의 곁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욱씨를 처음 심었다. 계획하고 심은 것은 아니다. 토종 아욱 씨 10개를 남편이 아는 분에게서 받아왔다. 아욱의 씨앗크기는 딱! 눈곱(통깨의 절반도 안됨)만하다. 계획에 없던 것이라 귀퉁이에 심고 관심도 덜했다. 2주가 지나도 싹이 나지 않기에 ‘그럼 그렇지 눈곱만하더니만’하던 차에 보란 듯이 싹이 나왔다. 21일만이었다. 그마저 미덥지 않은 마음이 남아 처음엔 ‘봄풀인가?’ 했다. 그런데 싹이 커가며 여타의 봄풀과 모습이 달랐다. 봄에 돋아나는 오만 풀들이 모두 싱그럽지만 아욱의 자태는 남달랐다. 잎은 마치 치맛자락에 프릴이 달린 듯하고 꼿꼿하게 키가 크면서 녹색 치마를 펼치듯 위로 자랐다. 녹색치마는 비단결의 윤기까지 흘렀다.(과장된 표현 같지만 실제로 마트에서 파는 아욱과 토종 아욱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고운 녹색 치마를 채취할 때 내 손이 저절로 조심스러워지고, 씻을 때 그 보드라운 살결에 감탄까지 더해졌다.
살아오면서 국만 끓여 먹었던 아욱이다. 아욱이 넘치도록 잎을 내 주자 나는 살짝 데쳐 된장에 무치거나, 새콤달콤 고추장에도 무쳐 보았다. 이런저런 조리 실험(?)을 하며 같은 작물이라도 날마다 새로운 찬이 되었다. 어디서도 먹어 보지 못한 내 맘대로의 찬이다. 텃밭을 일구면서 작물의 모습을 주의 깊게 들여 다 보게 되었고 작물을 더 깊게 맛보았다. 귀촌하면서 모르는 것 투성이가 되었지만 점점 낯선 것들에 익숙해지고는 있다.
순환의 시간을 거치면서 아욱은 별 모양의 꽃을 피우더니 씨주머니를 매달기 시작했다. 그 씨주머니 모양이 또 눈길을 끈다. 예쁘게 빚은 딤섬이다. 입추와 말복이 지나며 씨주머니가 커지고 씨가 영글어 간다. 별꽃을 피운 채로 씨를 영그는 모습이 신비하다. 마침내 씨주머니가 갈색으로 변하면서 마르고 씨가 여문 듯해서 비가 오기 전 채종하기로 했다. 굵어진 가지를 조심스럽게 베어내 넓게 펼쳐 놓은 종이 위에 눕혔다. 앉아서 딤섬 모양의 주머니를 일일이 떼어냈다. 하나의 씨주머니에는 그 눈곱만한 씨가 정확히 10개씩 들어 있다. 도대체 오늘 나는 몇 개의 씨앗을 얻은 것인가? 씨주머니가 백 개라면 씨앗이 만 개 아닌가? 내가 떼어 낸 씨주머니는 족히 수백 개다. 채종 내내 ‘핵무기보다 강력한 평화공세의 종자’라는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글이 떠올랐다. 시작과 끝이 없는 자연에서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개개의 생명뿐, 전체적으로 보면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나는 채종 하면서 아욱의 시작 전의 시작을 다시 볼 수 있었다.(글 김상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