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전 지수중학교 교장)
명절 당일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기 어려워 명절 전에 미리 빙장어른께 인사를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경남에 사는 내가 충남에 있는 처가를 가려면 전북을 거쳐간다. 먼 길이다 보니 중간에 쉬는 곳이 늘 전북 전주다. 점심을 먹고 전주 덕진 공원 내에 있는 OOO 도서관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OOO 도서관은 전주 시민들이 편안하고 자유롭게 책을 보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일반 도서관 열람실보다는 조금 자유로워서 작은 소리로 대화가 가능한 공간이다.
휴일 오후, 도서관에는 아이들과 함께 온 젊은 부부들이 보였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도서관이기는 하지만 일반 도서관보다는 조금 자유롭고 편안한 공간에서 나도 평소 잘 보지 못했던 그림 이야기 책을 읽었다.
나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젊은 엄마가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조금 크게 들렸다. 나만 그렇게 듣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그 젊은 엄마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와 톤은 매우 훌륭했고 두 아이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소리가 조금 큰 것만 제외하면 별 문제가 없는 상황이라 불편하지만 의사표시를 자제하는 듯했다.
하지만 책 한 권이 끝나고 아이들이 또 읽어 달라고 졸랐다. 그리하여 다시 새로운 책을 읽어 주기 시작하자 마침내 가까이 있던 사람 중에 누군가가 조금 조용히 했으면 좋겠다고 의사표시를 했다. 하지만 그 엄마는 이전과 별 차이 없는 톤으로 책을 읽어 주었고, 이어서 또 다른 누군가 조금만 조용히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젊은 엄마는 불쾌한 듯 책을 놓고 나가면서 뭔가를 이야기했지만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가 엄격히 보장된다. 헌법으로 보장하는 기본권이다. 그 젊은 엄마가 자신의 아이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 장소에 있었던 약 20여 명의 사람들이 침해당한 약간의 자유를 뺀다면 완벽하게 보장되어야 할 권리에 속한다. 하지만 자신의 자유를 위해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다양한 문제의 원인이 된다. 극단적으로 범죄가 되기도 하고 지금처럼 도덕적 문제로 남을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자유’만큼이나 중요한 가치가 바로 ‘공화’다. 헌법 1조에서 밝히고 있듯이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즉 공화의 가치는 민주의 가치와 동일하게 존중되어야 하는 중요한 가치다. 그 젊은 엄마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동화책을 읽어 주었지만 자신의 행위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것인가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오히려 타인의 두 차례에 걸친 제재에 대하여 자신의 신성한 동화 구연을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가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공화의 가치가 고민되어야 하는 지점인 것이다.
단적인 예로 학교에서 최근 십 수년 이래로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면 타인의 아이들이 겪는 고통이나 불편은 문제가 되지 않는 학부모들을 자주 만난다. 폭력을 행사하고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자신의 아이를 감싸는 부모와 그것을 지적하는 교사에게 오히려 공격적 민원을 제기하는 학부모들을 마주하면서 그 원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참으로 많다. 내가 내린 작은 결론은 우리 사회를 지지하는 중요한 가치인 민주와 공화의 가치가 더 이상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유는 매우 다양하지만 결정적으로 우리 사회 전체가 개인의 자유에만 골몰하는 경향이 커진 탓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민주에 바탕을 둔 자유가 보장되면서도 반드시 유지해야 하는 것은 헌법 1조에 제시되어 있는 공화의 가치다. 이를테면 ‘겸손’이나 ‘존중’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 등인데 이것이 바로 공화의 가치를 나타내는 예시 들이다.
비록 공공장소이기는 하지만 내 아이의 정서 발달을 위해 동화를 읽어주는 것이 왜 문제냐며 불만스럽게 도서관을 나가던 그 어머니에게 공적인 공간에 함께 있던 다른 이들의 자유는 이미 배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공화의 가치를 망각했거나 아니면 공화보다는 자유의 가치를 더 우위에 두었을 것이다. 공화의 가치가 침해되는 순간 우리 사회는 균형을 잃게 된다. 즉 민주를 바탕으로 하는 자유의 가치를 더 주장하는 순간 공화의 가치(‘겸손’ ‘존중’ ‘배려’ 등)는 위협받게 되고 이러한 공화의 가치가 흔들리면 순환적으로 자유의 가치 역시 침해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민주와 공화의 가치를 배우고 익히는 곳이 바로 학교다. 지금 민주와 공화의 가치가 균형을 잃은 것은 교육의 역할이나 방향, 그리고 가치가 흔들렸다는 방증이다. 즉 그 젊은 엄마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그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아주 극단적으로 학교 교육에서 배려나 존중의 가치를 등한시했음에도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학교에서 그리고 교실 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대한 배려와 존중이다. 그것만 유지되어도 학교는 그리고 교실 살이는 건강하고 아름다워진다. 더불어 사회도 아름다워진다. 무엇이 현재 우리 교육에서 존중이나 배려, 즉 공화의 중요한 가치를 잃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