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목적도 읽는 책의 종류도 나이와 사는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청소년의 독서는 학습을 위한 것이고 청년의 독서는 삶의 내용 및 방향 찾기라면, 중장년의 독서는 자기 계발이 주요 목적이고 노년의 독서는 깨달음과 수양이 목적이 아닐까? 평생 교사로 살아온 나의 경우 굳이 따지자면 남을 가르치기 위한 독서를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내 교과를 가르치기 위해 관련 지식을 익히고 더 깊은 지식을 체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교사는 교과만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가르치는 사람이었기에 학생들의 삶의 방향 정립을 위해 철학적, 사회과학적 사유를 위한 독서를 해왔다. 굳이 말하자면 교육용 독서를 해온 것이다.

학교에서 물러난 지금 누구를 가르치기 위한 독서를 할 필요는 없다. 굳이 가르쳐야 하는 대상이 있다면 나 자신뿐이어서 나 자신을 가르칠 일만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수양을 위한 윤리적인 독서를 하게 된다. 그렇다고 어려운 철학이나 윤리학 저서를 읽는다는 뜻은 아니다. 손에 자주 잡히는 책이 노장철학 등 마음의 수양에 관한 책이다. 특히 은퇴 이후 시골에 귀촌해서 살게 되다 보니 자연이나 농사에 대한 책을 자주 읽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농사일을 크게 하는 것은 아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구는 아내가 이쪽 분야 책을 자주 읽고 읽은 책을 나에게 토스하다 보니 자연과 농사에 관련 책을 함께 읽게 되는 경우가 많게 된 것이다.

책이라는 것이 한 권을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린이들의 끝말잇기 놀이처럼 한 권을 읽다 보면 그 책에서 소개하거나 언급된 책들을 찾아 읽게 된다. 또 그 책에서 소개한 책을 읽고 하는 식으로 연속적으로 읽다 보면 그 분야의 책들을 꽤 많이 소화하게 된다. 최근에 읽었던 황대권 선생의 <야생초 편지>가 그런 예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지난 3월 거창에서 우연히 황대권 선생을 만난 일 때문이었다. 이 책은 워낙 유명한 것이어서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내용은 자세하게 생각나지 않지만 말이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후쿠오카 마사나부의 <짚 한오라기의 혁명>을 읽고 다시 그의 책 <자연농법>을 읽고, 이 책을 번역한 최성현 선생의 삶이 궁금해서 그의 저서 여러 권을 읽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꼭 마사노부 식의 자연농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고향에 돌아와 농사짓는 분들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마사노부의 책들이 철학책 같다면 이분들의 책은 ‘현장의 농사 분투기’라고 할 수 있다. 한 분은 학교 교사를 하다가 고향에 돌아와 농사짓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 농부이고, 다른 한 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갑자기 시골에 눌러앉아 농사짓는 젊은 아가씨 농부이다. 계절별로 구분한 책의 구성방식과 농사와 관계 깊은 24절기의 에피소드로 짜인 내용 등 두 책의 체제가 비슷한 면도 있다.

이동호 작가의 <어느 고독한 농부의 편지>는 농대를 졸업하고 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나이 들어 퇴직하여 고향에 돌아온 인생 경력자의 삶의 편력과 자기만의 농법을 실험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농사 지식뿐만 아니라 삶을 관조하고 때때로 냉소하는 시각, 이따금 한 마디씩 인용하는 고사와 예들이 감칠맛 난다. 이분의 이야기는 따로 할 필요가 있다.

김영화 작가의 <시골에서는 고기 살 돈만 있으면 된다면서요>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깊은 산골에 산다는 저자의 좌충우돌 초보 농사꾼 이야기다. ‘아직도 미친년 널뛰듯 농사를 익혀 가는 초보 농사꾼’이라는 저자 스스로의 표현대로 말 그대로 젊은 아가씨의 농사 분투기로 시골에 정착하면서 경험하는 시행착오를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은 계절별로 농사짓는 생활 이야기이다. 도시에 살다가 시골에서 새 둥지를 틀었지만, 농사를 짓지 않는 지인들도 만나면 계절 이야기를 자주 한다. 계절은 순환되고 그 순환은 시작과 끝이 없다. 씨를 뿌려 시작하고 수확해서 마치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겨울 이야기를 첫 번째로 넣으면서 겨울은 농사를 시작하는 계절이라고 말한다. 자연의 순환 속에 자리매김하여 공생하는 삶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계절을, 날씨를 피부처럼 느끼며 농사에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도 한 번쯤 읽어 보면 좋겠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자연의 일부이고 계절의 순환 속에 시작과 끝이 있는 생명체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저자의 간명 직절한 문체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농사를 종교처럼 품고 평생 한길을 걸으며 진심을 다해 농사짓는 사람들이 내 옆에 있다.”는 글에서 농사의 규모와 관계없이 ‘진심을 다한다’는 말이 크게 남는다. 진심을 담지 않고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심을 담은 농사, 진실한 농부의 이야기를 모두가 한 번쯤 읽게 된다면 자연을 잊고, 아니 자연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도시에서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지 않을까?

농사는 철학이지만, 철학만으로는 안되는 것이 농사이기도 하다. 자연농법을 자신이 신봉하는 것은 좋지만 남에게 강요하기는 어렵다. 또한 농촌은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농촌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다. ‘씨앗만 뿌려놓으면 저절로 잘 자라고, 나무만 심어놓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는’ 곳이 아니라, 이들을 가꾸는 농부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더욱이 고기 살 돈만 있으면 나머지는 모든 것이 충족되는 목가적인 전원이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는 독일처럼 농촌의 경관을 유지하기 위해서 도시 사람들이 경관세를 내는 나라도 아니다. 젊은 여성 농부의 고군분투와 농촌의 현실 고발을 모두 한 번씩 읽기를 바란다.(글 전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