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미술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 함께 끝없이 넓고 깊은 상상의 세계로 나가고 있다. 어찌 보면 너무 멀리 간 나머지 비현실적 사건처럼 인간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없다. 즉 예술이 자연과 멀어진 만큼 우리의 인생과도 멀어진 것이다. 20대 약관의 나이로 투신한 자연미술은 인생과 멀어진 예술을 다시 우리 곁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하려 했다. 그동안 이 길을 걸으며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나의 예술 지평을 넓혀왔다.

그러나 이것은 책이나 교육을 통해 습득되는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현장의 체험에 크게 의지함으로써 자연과 밀착된 특성이 있게 된다. 따라서 자연미술의 태도는 현대의 반자연 또는 탈자연적 태도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다. 가뜩이나 예술가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전혀 쉽지 않은데 시대를 주도하는 흐름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주의나 주장을 펼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나의 자연미술 연구는 20세기 이후 100년 이상 미술계를 이끈 모더니즘과 현대미술이 지향하는 것을 역주행하는 것이다. 자연미술가가 주장하는 ‘예술의 주체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은 인류 역사상 처음 제시된 것이다.

살이 타는 듯한 햇볕 아래 부추를 베어내고 그것을 오브제로 작업을 하며 유익한 채소로서뿐만 아니라 베어내면 즉시 다시 자라나는 생명력에 매료되었다. 특히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는 꽃대의 지속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추 꽃대를 활용한 몇 가지 연작들은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상과 만남을 통해 비로소 상상력이 동원되고 대상이 지닌 특성은 때로는 자연이 주는 메시지로서 작품을 이루는 근간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화가의 작업은 작업실에서 이루어진다. 작가의 내면에 흐르는 예술적 의지를 외면화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복잡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언제나 창작의 현장에는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이 있게 마련이다. 때로는 물의 흐름과 같이 풀려나가는 기쁨과 희열도 혼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미술가는 언제나 그 모든 것을 자연과 함께한다. 그들은 마치 자연과 동업자 같은 의식을 갖는다. 창작예술에 있어 그들의 ‘자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라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다.

꽃대를 동그랗게 묶어 병에 꽂았으나 일부 꽃대가 스스로 묶음을 풀고 자유로운 공간으로 팔을 뻗었다. 이것은 곧 자연의 경이로운 회복력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