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유목을 처음 시작하던 날 적당한 시기에 한국 음식을 만들어 작가들과 함께 나누기로 했었다. 우리는 단단히 맘먹고 김치 담그는 데 필요한 각종 재료와 김밥까지 준비를 해왔는데, 이란의 음식이 맛있는 데다 가는 곳마다 진수성찬이고 빡빡한 일정에 시간마저 없어 행사가 다 끝나가도록 이 계획은 성사되지 않았었다. 결국 마지막에 기회가 왔다. 18일 개막 전날인 17일 오전까지 모든 일정을 마치고 오후부터는 자유로운 일정이었다. 그러나 테헤란에서 김치를 담그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마침 그날이 마호메트의 탄생일이라서 휴점하는 가게도 많았지만, 특별히 김장용 배추를 구하는 일이 어려웠다. 점심 먹고 오후 2시경 조리를 시작하려 한 것이 다섯 시가 다 되어 주방에 도착했다. 그러나 남의 주방에서 요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요리를 해본 사람은 안다. 이란 여류작가들에게 잔심부름을 시켜가면서 불과 2시간 만에 25명이 먹을 김밥과 김치, 된장국 불고기 요리를 끝냈다. 모두 한국의 맛에 취해 배불리 음식을 먹었다. 나도 김밥을 마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자르면서 귀부레기를 많이 먹은지라 배가 불렀다. 마술하듯 뚝딱 만들어 냈지만 네 가지 음식이 모두 수준 있는 맛을 냈다. 그중에도 시금치를 넣고 끓인 된장국이 자타 모두 인정하는 백미였다.
결국 음식을 다 먹고 설거지까지 끝낸 다음 나달리안 박사가 집주인답게 모두 국가를 대표해서 노래 한 곡씩 부르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강작가가 ‘아침이슬’을 뱃심 좋게 불러 모든 사람을 압도했다. 그의 불룩한 배가 그냥 폼으로 나온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만 했다.
18일, 일요일이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일하는 날이다. 이란 노마드의 대미를 장식하는 날이기도 하다. 행사 시간이 오후 여유는 있었지만 점심을 먹자마자 모두 정갈하게 차리고 나섰다. 행사장인 테헤란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슬람교 혁명 이전에 건축되었으며 한때 세계 5~10위권의 현대미술 컬렉션을 자랑하던 곳이다. 당시 팔레비왕의 부인이 미술에 대한 안목이 대단하여 이 미술관을 짓고 1960년대 전후로 당대 최고의 예술품들을 대거 소장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슬람교 혁명 이후 이슬람교 문화와 어울리지 않는 작품들이 매각 처리되고 일부 작품들은 미술관에서 자취를 감추는 등 혁명 이전의 명성을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자코메티, 마크 에른스트, 알렉산더 콜더 등의 작품이 쉽게 눈에 띄었다.
개막식은 국민의례와 함께 시작되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우렁찬 노래와 뒤를 이은 낮고 굵은 음성의 아마도 우리의 “국기에 대한 맹세” 격인데 이란에서는 아마도 코란의 주요 구절을 낭송하는 듯했다. 이어서 노마드 현장을 녹화한 화면이 상영되고 현대미술관의 책임자 인사, 이란 노마드 감독 인사에 이어 고승현 회장의 축사가 대독으로 소개되었다. 아울러 노마드의 사진 다큐 전시를 돌아보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행사장에는 일부 언론과 이란 텔레비전에서 취재했고 총감독인 나도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개막행사와 다큐 전에 이어 강당에서 3차 토론이 진행되었다. 토론의 주제는 “도시환경에서의 자연미술 또는 환경미술의 기능 및 관련성과 유용성”이었다.
발언요지 : 환경이라는 말은 사람을 둘러싼 경관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환경에는 자연과 인공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들판에 서 있다면 당신은 100%의 자연환경 속에 있는 것이며, 반면 도심의 교차로 한가운데에 서 있다면 당신은 아주 적은 자연환경을 갖게 될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환경 또는 환경미술을 말할 때 대부분 생태환경에 치우치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인위적 환경도 환경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자연을 어떻게 생활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 이다. 만일 당신이 25층 아파트에 산다면 불행하게도 당신은 매우 제한적인 자연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당신 주변에 자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매일 아침 창문을 봐라 거기에 하늘이 있고 그것도 당신이 누릴 수 있는 자연인 것이다. 화분에 씨를 묻고 매일 물을 주면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또 다른 씨앗을 맺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그것도 자연인 것이다. 결국 우리들의 관념이 문제이다. 자연미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목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산업사회 이후 멀어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복원하여 공존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미술 작업은 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환경도 매우 중요한 몫이다. 따라서 자연미술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작품을 통해 자연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공주에서 진행되는 자연미술비엔날레는 자연과 함께 작업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을 초대하여 자연미술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우리의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이벤트다. 그리고 그 작품들이 자연미술공원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공원을 찾아 관람 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앞에 펼쳐진 작품뿐만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자연환경을 함께 보게 되는 것이다.
12월 4일부터 18일까지 2주일간의 이란 노마드가 참가한 작가들은 물론 관계자,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도큐멘테이션을 관람한 사람들까지 의미 있는 울림을 주고 막을 내렸다. 이제 모두 떠나고 혼자 조용히 숙소인 호텔에 남았다. 모두 아쉬운 작별이었지만 노마드는 꿈이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현실이다. 우리는 모두가 현실이라는 조직 속의 세포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일을 마치고 돌아갈 보금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크든 작든 조직이 건강해지려면 그 조직을 떠받치는 세포들이 건강해야 한다. 노마드에 참가했던 작가들 역시 그들 나름의 조직 속 활성 세포들이다. 그들이 이란의 자연으로부터 또는 역사와 문화로부터 강렬한 인상과 함께 재충전된 힘으로 자신들의 조직을 더욱 활성화할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은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꾸어 주리라는 것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으로 아흐마드 가의 나달리안과 베자드 부자의 헌신적 노력과 참가한 모든 작가의 순수하고 창의적 영혼에 머리 숙여 감사하며, 행사의 진행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준 테헤란시 당국과 테헤란현대미술관의 관계자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행사 기간 하늘로, 바다로 사막으로 계곡으로 때로는 도심으로 분주하게 오고 간 궤적이 적지 않은데 단 한 번의 문제도 발생하지 않고 무난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던 점에도 감사를 드린다. “세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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