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친구 중 유일하게 가까운 벗이 있었다. 3년 동안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잘 알지 못했는데 벼락치기로 미대 입시를 준비할 때 같은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며 동병상련을 앓았고 대학을 같이 다니며 더욱 가까워졌다. 우린 늘 함께 자취하고 화실도 같이 썼으며 같은 시기 한국화에 입문한 후로 줄곧 선의의 경쟁을 하며 발전하였다. 우리는 심지어 군대도 같이 갔었다. 비록 훈련소 입소 전 수용 연대에서 헤어졌지만 친구와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다.
곰나루의 전설이 어린 공주의 연미산 너머 신웅리가 친구의 고향이었다. 부모님은 원래 경기도 양평이 고향인데 전쟁통에 피난 내려와 마곡사가 있는 사곡면 어느 산골에 사시다 전쟁이 끝나자 아예 산아랫마을에 눌러앉아 자리를 잡고 아버지는 목수 일을 하셨었다.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과 육아 그리고 4형제 교육을 위해 기름 짜는 일을 하셨다. 맨주먹 쥐고 피난 나온 타향살이가 얼마나 고되었을까? 그래도 전쟁통에 홀로 된 외할머니와 함께 7식구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 동네에 기름집 셋째 아들이 내 친구였다.
대학교 2학년 봄 친구네 모내기 돕기를 갔다가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동네 지천에서 톱으로 밤고기 잡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그날밤 살 오른 붕어가 얼마나 많았던지 도깨비에 홀린 듯 건져 냈었다. 잡은 붕어가 너무 많아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고 친구가 말했었다. 친구와 나는 같은 시골뜨기 또래여서 그런지 유년의 경험과 정서적 공통점이 많았다. 같이 어울리던 인천 친구는 늘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린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70년대의 공주와 인천은 지역 간 격차가 컸었던가 보다. 아무튼 우리는 가족 또는 주변의 환경 등 모든 것을 공유했었다. 언젠가 그가 뼈아픈 상처를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의 중학교 때 아니었나 추측된다. 학교가 파한 후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소에게 먹일 여물을 썰다 그만 아버지의 오른손 엄지가 작두 날에 잘리는 사고가 났다. 당시 친구의 아버지는 피가 솟구치는 상처를 움켜쥐고 아프다는 소리 대신 "아이고, 이제 우리 식구 다 굶어 죽겠구나!"라고 절규에 가까운 탄식을 하셨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접합 수술을 받았을 터인데 당시는 의술이 지금 같지 않아 엄지 하나를 영영 잃고 만 것이다.
그 일로 우리는 자신의 상처보다 가족의 안위와 생계를 먼저 걱정했던 우리 부모들의 숭고한 희생과 책임감을 가슴 저리도록 느끼게 되었다. 그 후 친구 아버지는 일터에서 망치나 대패를 쥘 때 불편함을 어찌 극복했을까? 아버지의 없어진 엄지를 볼 때마다 친구는 또 얼마나 민망했을까? 그 어른은 우리가 대학생 때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친구도 10년 전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하고 많은 세사를 젖혀두고 어찌 그리 쉽게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평소에도 예지력이 있었다. 그랬던 그의 마지막 문자를 나는 잊을 수 없다.
친구와 나는 1980년대 '야투 자연미술운동'의 기수였으며, '벽 바닥 그리고 의식' 그룹을 통해 늘 함께 활동했었다. 그는 재기넘치고 강직했지만, 인정 많고 재담이 뛰어나 어느 좌중에서도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태권도를 잘했고 유년 시절 희극인을 꿈꿀 만큼 분방한 성격이었다. 보고 싶은 친구 어디쯤 가고 있나?
수직 - 빗살, 이동구, 1982 가을, 공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