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진주고등학교 교사)
비가 오다 말다 하더니 저녁이 되어서야 굵어졌다. 일기예보는 어제부터 줄곧 비가 온다고 주장했지만 거의 하루가 지나서야 비로소 굵은 비가 내리고 있다. 자연은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비 내리는 주말은 딱히 할 일이 없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책을 읽다가 일정 부분, 혹은 몇 개의 문장에서 멈출 때가 있다. 간혹 아예 책을 덮을 때도 있다. 그 미묘한 감정의 흐름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내놓기는 어렵다. 2013년 독일 서부 노이비트 출신의 과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파도바(Thomas de Padova, 1965~)가 발표한 『Leibniz, Newton und die Erfindung der Zeit』(라이프니츠, 뉴튼 그리고 시간의 발명)의 이런 문장 앞에서 멈췄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기억이 현재를 소생시키고 현재는 미래를 잉태한다고 말했다. 즉 시간 질서는 인과관계로 환원하다.”(230쪽) 기억과 현재와 미래…… 기억은 분명 과거를 가리킨다고 가정할 때, 현재는 과거에 의존하여 일어나게 되고 동시에 그렇게 일어난 현재는 다시 미래의 원인이 된다는 말인데……
과연 그런가? 불교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라이프니츠 당시에도 이미 불교는 서양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물들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어서, 그 스스로의 자아가 없다. (무아無我) 무아이기 때문에 곧 공空이며 나아가 무자성無自性이다. 즉 만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이므로 실체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시간은 무자성이니 실체가 아니다고 말할 수 있다.
도덕경은 중국에 불교 전래 이전의 문건이기는 하지만 왕필(王弼, 226~249)이 도덕경에 주註를 달던 시절에는 이미 중국 전체에 불교는 퍼져 있었고 왕필처럼 뛰어난 천재가 불교의 교의를 몰랐을 리 없다. 따라서 왕필 이후의 도덕경(현재의 왕필본 도덕경)에는 불교적 뉘앙스가 자주 느껴진다.
하지만 꼭 불교에서만 원인과 결과(연기설)의 이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특별한 공부나 생각이 없어도 일상의 주의력으로 사태를 깊게 살펴보면 세상일에는 거의 '연기'(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지배함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적인 사태는 드물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파악한다고 해서 곧장 ‘공’이나 ‘무자성’ 등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역시 아니다.
도덕경 81장 전체의 진술 구조는 사실 거의 원인과 결과의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즉 “~라면 ~그러하고(하지 않고), ~라면 그러하지 못하다.(그러하다.)”는 식의 논리구조가 도덕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진술방식이다. 노자께서 그렇게 표현했거나 아니면 왕필이 그런 식으로 방향을 틀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 사는 세상 일이 원인과 결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쓰였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뿐이다.
도덕경의 핵심은 말할 필요 없이 ‘도’와 ‘덕’이다. 도를 설명함에 있어서는 ‘연기’적 방법이 자칫 논리적 모순에 빠지기 쉽다. 그런 이유로 노자께서는 도를 이야기할 때는 짐짓 ‘연기’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맨 처음의 “도가도 비상도”가 그러하다. ‘도라고 부르는 것은 도가 아니다.’ 하지만 이 말도 면밀하게 따지고 보면 ‘연기’와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연기’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 이를테면 ‘도’라고 부르는 것들을 ‘도’라고 인식하는 것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인데, ‘도’라는 발화가 일어나는 순간 그것은 ‘도’가 아닌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애당초 잘못된 원인이 잘못된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즉 ‘도’의 발화가 ‘도’의 의미를 제한, 혹은 한정하는 원인행위가 되어 잘못된 결과에 이름)을 경계하는 이야기가 그 핵심이다. 즉 잘못된 원인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다는 이야기다.
어제 시작한 글쓰기가 일요일 밤까지 이르렀다. 어제 책(라이프니츠, 뉴튼 그리고 시간의 발명) 마지막 부분에 ‘세계의 인과 구조’(앞의 책 338쪽)라는 소제목에 이르러 다시 멈췄다. 사실 이 책은 이미 여러 번 읽었으니 여기서 멈춰도 문제가 없다. 시간조차도 원인과 결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노자, 불교, 서양의 자연과학, 마침내 우주 공간까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내일은 날이 맑을 것이라는데, 연꽃이 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