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껏 탑승 경험 가운데 기창機窓을 꽉 닫은 채 이착륙한 기억은 이번이 처음. 널리 알려진 청주공항은 물론 인민해방군이 관리하는 중국 연길의 조양천국제공항은 더욱 삼엄했다. 길림성 동부에 위치한 연길(延吉, Yenchi)은 조선족 자치주로서 60만 명 남짓이 거주하는 도시답게 첫눈에 만만찮은 규모였다. 그동안 TV 화면에서 보던 모습과 같이 저잣거리는 번화했고 대다수 한글 간판은 선명했다. 다만 동북공정사업 이후 중국 당국이 취한 한자 우선 병기방침에 따라 우리말도 교육현장에서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게 가이드의 전언.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한 지난 3년간 성내 곳곳을 대대적으로 손봤다더니 과연 겉으로는 번듯한 그림이었다. 필자의 눈에 비친 두드러진 부분은 매끄러운 노면 상태. 맨홀을 비롯한 경계석의 마무리는 나무랄 데 없었고, 연결도로의 원활한 신호체계 역시 무난했다. 무엇보다 보행로 기울기가 인체구조에 들어맞아 걷기 편했으며, 요철이 거의 없어 무심코 걸어도 될 만큼 뒤처리가 맘에 들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불편한 보도블록은 언제쯤 고쳐질까? 막 출범한 새 정부에서 해결할 현안이다.

미인송공원, 이도백하


도심 한가운데 ‘미인송공원’은 미인이란 이름처럼 인공과 자연의 조화로움이 인상적이었다. 적송으로 뵈는 울창한 솔숲을 산림욕에 알맞게 보호한 일도 놀랍거니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키 큰 소나무들 사이로 산책하기에 적절한 동선을 확보하면서 최대한 훼손을 방지한 점이 뛰어나다. 요소요소에 배치한 팻말이나 아기자기한 꽃밭, 각종 조각상, 글귀를 새긴 조경석의 어울림도 전연 작위적이지 않다. 그러고 보니 외곽 고속도로를 달려오면서 줄곧 느낀 바는 적어도 자연보호 측면에서 중국 정부의 시책은 선진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를 흐르는 하천을 끼고 경작지를 일궈가면서도 조심스레 차굴(터널)을 뚫고 수풀이 띠를 이룬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선뜻 유럽의 여느 마을을 떠올릴 정도였다. 옥에 티라면 방치된 ‘유리 잔도’는 그렇다 쳐도 멀끔하게 단장한 이도백하를 따라 이어진 물길이나 가로수에는 한두 군데 작은 흠집이 보였다. 수십 년 자란 나무 한 그루의 소중함을 아는 위정자라면 여타 정책적 고려에서도 허투루 사안을 처리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갔다.

용두레 우물, 용정시 이름의 유래가 된 우물

고 박경리 님의 대하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용정시 현재 인구는 25만가량. 그러니 예전 모습을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오가는 길목에서 맞닥뜨린 시골 풍경은 정겨웠다. 길가에 늘어선 소박한 장터에서 길손을 쳐다보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와 앙증맞은 삼륜차가 대로를 운행하는 가운데 용두레 우물을 찾아가니 ‘거룡우호공원’(1996년 경남 거제시와 자매결연 기념)이 조성되어 있었다. 당국에서 따로 표기한 붉은 글씨에는 ‘革命老區龍井(혁명노구용정)', 짐작건대 '노구'라는 표현이 옛 지명을 뜻하는 것 같아 유래를 알아보니 바로 옆에 ’용정지명기원지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는 비석과 함께 이 지역에 살던 만주족들의 샘터가 남아 있었다. 이는 본래 1880년 전후로 조선에서 넘어온 청년 장인석과 박인언이 발견했다는데,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파괴한 것을 1986년 용정현 인민정부에서 복원했단다. 요 근처에 독립유공자 이상설이 세운 민족학교 서전서숙(瑞甸書塾)의 터를 가보고 싶었는데 일정상 들를 수는 없었고, 저 멀리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비암산 일송정의 배웅을 받으며 해란강을 따라 다음 행선지로 향해야 했다.

윤동주 생가는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 있다. 그 일대를 그럴싸하게 꾸민 정성이 갸륵했다. 입구에 '중국공산당명동촌지부위원회'라는 명패를 달아 대문을 세우고 게시판에 그에 관한 갖가지 소식을 전하더니 중심길 이정표 밑에 차례로 봉사중심, 일광하우스, 백년고택, 막걸리공장, 화장실 등의 안내판이 있었다. 문을 열지 않은 명동학교 옛터 기념관을 뒤로하고 마주친 김약연(윤동주의 외숙)의 흉상을 지나쳐 돌비에 새긴 시들을 읽어 나가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한눈에 정갈하게 마련한 생가터. 일제의 생체 실험으로 인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유고 시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겼다. 그러나 금세 필자의 눈을 어지럽힌 건 '서시'의 번역본. 제아무리 자국 우선주의를 표방한다고 해도 이건 금도를 어긴 게 아닐까. 한글보다 간체자를 앞세운 건 그를 중국 조선족으로 여긴 탓이렷다. 시 '자화상'에 나오는 우물도 상형문자인 한자를 뒷받침할 뿐이라면, 참새를 필두로 아로새긴 서시처럼 정작 한 점 부끄럼이 없는지는 각자의 몫이로되 시를 무기로 삼은 항일 투사라는 문구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Ph.D.)

윤동주 생가에서


* 필자 조하식은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현재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하며,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