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티와칸 입구


이번 여행의 첫 여행지인 멕시코와 우리나라와의 연관성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우리 선조들의 슬픔을 영화로 만들어 기록하고자 했던 '애니깽'. 이제 기억마저 희미해져 역사의 귀퉁이에 남아있는 우리 선조들과 에네켄 농장과의 가슴 아픈 사연이다. '4년 계약. 주택 무료 임대. 높은 임금'이라는 유혹에 속아서 120년 전 지구의 반대편인 멕시코까지 온 우리 선조들의 슬픔의 현장에 와 있는 것이다.

에네켄이란 제주의 고향집 마당 구석에 심어진 잎 끝에 가시를 삐죽이 내밀고 있는 용설란속屬에 속하는 식물이다. 지금도 고향 집에 가면 마당에서 반겨준다. 어릴 적 소꿉놀이할 때 갖고 놀던 용설란 속에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길가에 있는 에네켄 옆에 서서 선조들의 숨소리를 느껴 보고 싶어 숨을 크게 들여 마셔 본다.

도로는 넓고 차는 많고 사람 또한 많았다. 도시의 허파 역할을 해주는 공원도 곳곳에 많았다.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교통수단의 하나인 버스들이었다. 대형버스 2-3개가 하나로 연결된 기다란 버스도 대중교통 중 하나로 버스 속을 사람들로 빽빽하게 채우고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층으로 된 대형 버스와 일반버스가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의 마을버스 같은 소형 버스들도 있었다. 특히 소형 버스에는 행선지로 보이는 글자가 버스 사방에 쓰여 있었고, 버스에는 우리나라 6-70년대 버스 안내양 역할을 하는 남자가 버스의 문을 잡고 무어라고 소리치며 손님을 태워주거나 내려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보따리를 들고 뛰는 사람들도 보였다. 아〜 이 버스가 바로 어디서 어디까지 간다는 행선지만 정해놓고 어디서든 사람들이 태워 달라면 태워주고 내려 달라면 내려주는 정류장 없이 다니는 버스인가 보다. 한번 타보고 싶었지만 일정상 타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오래 전 제주 시내 동문 로터리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고 버스 문에 매달려 있는 안내양은 행선지를 외치고,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은 보따리를 들고 뛰고, 사람들이 모두 버스에 오르면 안내양이 오라이〜하며 버스의 옆구리를 치면 버스기사가 출발하던 시절인 5-60년 전의 현실이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더운 날씨를 피해 도심의 공원으로 나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앉아있는 시민들의 모습은 옛날 비석거리*에 나와 앉아 소문을 주어 나르거나 서로의 안부를 묻던 어머니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지지직거리는 기억이 오버랩되며 시간 여행을 온 느낌이 들었다.

인간의 삶이 변화하는 형태도 비슷비슷하게 이어지나 보다. 우리나라가 겪었던 과거의 상황을 답습하고 있는 이 도시의 오늘을 보며 지구 반대편에서 온 내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추억을 소환해주는 것이 여행의 매력인 것이다. 이튿날 저녁 다시 공원으로 나가 삶의 냄새가 끈적이는 사람들 틈에 끼어 이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대부분 대도시의 낮과 밤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낮에는 삶의 현장의 일상을 낱낱이 보여주고, 밤이면 휘황찬란한 불빛과 함께 감성이라는 그늘 속으로 스며든 사람들이 사랑에 촉촉이 젖어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공원에서 달콤한 저녁을 보낸 이들은 내일 아침이면 시간에 쫓기며 달려가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뛰어 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저녁이 되면 와이파이가 되는 광장이나 공원으로 모여들어 인터넷으로 서로 소통할 것이다.

여행이란 내가 속한 지역을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즉 여행에서 돌아와 냉장고를 열고 여행 중에 한없이 먹고 싶었던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만들어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곳. 몸을 편하게 뉘일 수 있는 곳. 그래서 여행은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돌아올 곳 없이 떠나는 것을 여행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나는 돌아올 곳 없이 떠나는 것을 여행이 아닌 유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행은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과는 의미가 다르며 돌아와서 안식을 취할 집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은 돌아올 집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오래 전의 광고 문구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써 사회의 일원이 되어 열심히 살아가다 한 번씩 주저앉아 쉬고 싶을 때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것이다. 이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가능한 것이다. 낯선 나라 또는 낯선 도시에 가서 어떤 사람인 섬바디somebody가 되어 돌아다니는 행복한 여행을 꿈꾼다는 것은 현재 지극히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건강을 위해 오늘 아침도 운동화 끈을 조이고 집을 나선다.

아즈텍 태양석, 국립 인류학 박물관

그림으로 설명된 도서, 국립 인류학 박물관

*비석거리 :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지명

*김양숙, 1990년『문학과 의식』시 등단 2009년[한국시인상]수상 2017년[시와산문 작품상]수상 2013년부천문화예술발전기금수혜. 2024년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활동비수혜. 시집『지금은 뼈를 세우는 중이다』『기둥서방 길들이기』『흉터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유』『고래, 겹의 사생활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