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용 시집 <희망이라는 절망>을 읽었다. 오랫동안 여러 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당혹스러웠다. 시 같지 않은 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시 같지 않다는 말은 수준이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보통 시라고 부르는 시의 형식과는 사뭇 다르다는 뜻이다.

나도 더러 산문시 형태의 시를 써왔지만, 시집 전편이 산문시 형식으로 된 시집은 처음인 것 같다. 시집의 시들은 몇 가지 점에서 파격적이다. 우선 형태에서 시의 운문의 형식이 전무하다는 점이고, 다루는 소재가 일반의 시인들이 하는 것처럼 단순한 정동情動의 문제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또한 평소에 써온 것들을 모아 시집을 낸 것이 아니라 산문시만을 한 권으로 기획하고 집필하고 발간한 의도적인 산물이라는 점이다.

시란 무릇 압축적인 언어예술이요, 근본적으로 자기 오락의 산물이라고는 하지만, 사회적 맥락에서 일탈한 진실 탐구 없는 짧은 글을 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감정과 영탄詠嘆의 범람이나, 소박한 도덕적 아포리즘으로 포장한 훈계 조調의 시들이나, 상징과 비유를 빌려 현실에서 적당히 도피해서 자신을 보호하거나, 시대착오적인 정치와 노동 현실에서 모순 철폐를 주장하는 투쟁적인 구호로 일관하는 시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정한용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쓰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시에서 전하려는 의미와 언어와 이미지가 너무나 쉬워서 해설이 필요 없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그가 쓰는 단어가 어렵지 않다고 해서 그가 시의 모판에 깔아놓은 시의 의미를 깔끔하게,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것이 반드시 쉬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시 쓰기의 주 목적이 감정의 배출이나 단선적 호소가 아니라, 그리고 시인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드러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적 관심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현실적 경제 문제에서부터 이데올로기(‘붉은 숲’), 근본적인 인생론적 문제까지 그가 바라보고 사유하는 영역은 매우 넓고 깊다. 그러나 그가 다루는 이슈는 거대담론이 아니라 미시적 일상사다. 조용조용 말하는 그의 평소의 말투처럼 분개하거나 소리 높여 외치지도 않는다. 그의 조신한 눈빛처럼 가만히 바라보되 현상과 사물과 사건과 언어에서 드러나는 문제를 정확히 잡아내고 그 문제를 철학적으로 사색하고 시적인 언어로 표현해낸다. 일상의 표층적 문제에서 문명과 현실의 모순, 인생론적 지혜를 탐구한다. 하나의 단어('빠지다')에서, 산책길이나 여행길에서('우수아이아'). 시위 현장에서('키세스키세스 키세스')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큰 문제로 포착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그가 한국 시단詩壇에 ‘시란 무엇인가’, 또는 ‘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정면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세계 즉 현실과 현상에 대한 깊은 철학과 사색 없이, 한탄과 영탄과 같은 감정의 배설, 도덕적 훈계와 얕은 지혜의 형식으로서 시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 시는 서사, 철학, 서정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으로서 정한용의 시집 <희망이라는 절망>은 질문과 풍자와 해학을 통해서 일상의 서사敍事를 철학적으로 고민하고 시적으로 드러낸 시집이라고 생각한다.

표제시인 ‘희망이라는 절망’은 누구나 희망과 행복을 말하는, 아니 바라는 우리 시대가 실상은 절망에 깊이 빠져 있다는 역설을 보여주는 좋은 시이다. 앞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시에 대한 언급을 한 바 있어 이 시의 소개는 생략하고, 시인이나 내나 나이 먹어가면서 마냥 초연할 수 없는 시간의 문제를 다룬 시(‘시간 저장소’, ‘시간의 얼굴’)를 한 번 더 읽어보는 것으로 나의 시 감상을 대신한다. 시간은 혼자 저절로 터덜터덜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주인공을 바꿔가면서 순환적으로 흐른다. 우리도 잠깐의 주인공으로 있다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 아쉬워 할 필요도 없다. 경쾌한 윤회를 즐길 뿐이다. 그의 시에는 그런 달관의 냄새가 난다.

며칠 전까지 꽃잎 날리던 나뭇가지에 지금은 연두

잎사귀가 꽂혀 있다. 향기 머물던 자리엔 누군가 서성

인 발자욱이 얼룩덜룩하다. 오래전 어머니가 상추 가꾸

던 텃밭에 오늘은 내가 쑥갓을 심는다. 흙에 버려져 반

쯤 파묻힌 플라스틱 통에서는 민들레가 피어났다. 숲으

로 이어져 느릿느릿 산보하던 길에는 어느새 최신형 전

기차가 다닌다. 묵은 원한으로 쏜 총알이 순간 멈춰, 노

래가 되기도 하고 격렬한 호소가 되기도 한다. 어디에도

빈틈은 없다. 꿰맨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어제의 갈

피를 오늘이 뚫듯, 오늘의 간극은 내일의 에테르로 메꿔

진다. 꽃 진 자리에 곧 새똥 같은 열매가 돋으니, 지워졌

다 새겨지는 오랜 내력이 인류세가 지난 다음에도 계속

될 것 같다. 그러니 지금 헐렁헐렁한 틈도 참을 만하고,

내가 곧 지워져도 괜찮다. 고개를 끄덕끄덕, 살래살래,

갸우뚱...어쨋든, 다 좋다.

- 정한용, ‘시간에는 빈틈이 없다’, 전문

(글 전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