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공산성에서
꿈은 우리 인식의 세계를 드나들며 인생을 함께 산다. 오랜 꿈을 간직한 사람은 심지어 그 꿈을 닮아 간다. 자다가 꾸는 꿈은 내용에 따라 길몽, 악몽, 현몽 등 실제 삶과 연결되기도 하며 별 의미 없이 잠자리만 뒤숭숭하게 하는 개꿈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스스로 계획하고 설계하며 차근차근 만들어 가는 꿈도 있다.
나의 유년엔 특별히 생각나는 꿈이 없다. 꼭 집어 말할 수 없으나 그때는 그냥 사는 것이 힘겨웠다. 대부분 가난과 싸우고 삶의 무게에 눌려 꿈을 품을 여유가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린 나이에 십리 길을 걸어 통학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눈보라가 치고 소낙비가 내리는 날도 동전 한 닢이 없어 자갈길 4킬로미터를 걸어 등교해야 했다. 중학교는 더 멀어져 6킬로미터를 걸어서 다녔다, 독서는 거의 하지 않고 어른의 권유로 집에서 한문 공부를 조금 했을 뿐, 여가 시간엔 산으로 나무하러 가거나 소에게 풀을 뜯기고 집안일을 돕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시절 동네에서는 나뭇짐이 가장 큰 사람이 누군지 화제가 되었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검정 고무신과 빡빡머리 빛이 바랜 체크무늬 책보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가장 큰 기쁨이 가방을 들고 운동화 신고 집을 나서는 것이었을까? 남들과 똑같이 교복을 입는 것도 자존감 회복을 위해 한몫했다. 중학생이 되어 나는 처음 꿈을 갖게 되었다. 그때 나의 꿈은 '농부가 되는 것'이었다. 참 특이하게도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도록 나를 이끈 것은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학교에서 배운 노래였다.
푸른 산 기름진 들 동녘 땅 삼천리
우리는 더운 가슴 꿈을 엮는 젊은이
우리의 내일을 흙 속에 그리며
겨레에 앞장서서 씨를 뿌리리
<후렴>
보아라! 흙의 아들딸 흙을 보아라!
젊음을 불태우며 흙과 함께 살리라!
이 노래를 생각하면 50년 지난 지금도 뭉클하지만 그땐 정말 대단했었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소름이 돋을 만큼 감명 깊었다. 나는 이 노래를 통해 ‘대한의 아들로 태어나 흙과 함께 사는 삶이 가장 보람 있는 인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수업 시간 창문 밖 농고 선배들의 일하는 모습에 빠져들어 선생님 몰래 그들이 일하는 것을 훔쳐보았다. 땅 파고 묘목 심고 물 주고 가끔 땀이 밴 수건으로 이마를 닦는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 무렵 나는 교실 안에서 진행되는 수업에 대한 흥미를 점점 잃기 시작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이야기나 논산훈련소에서 '진짜 사나이'를 수없이 반복해 부르는 이유를 알만하다. 어린 아이가 보는 대로 따라 하거나 병사들이 노래를 부르며 노래 속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중학교 동창들에게 '영농의 노래'를 기억하냐고 물었다. 모두 "그런 노래를 어떻게 기억하느냐?" 또는 "우리가 그런 노래를 배웠다고?"라고 되물었다. 난 뭐지? 나는 왜 그 노래에 발목이 잡혔을까?
중 3때(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