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들은 오후 5시 퇴근 무렵을 ‘술시’라고 한다. ‘酒(술주)’ 자에서 삼수(水)변을 빼면 ‘酉(닭유, 술유)’자가 되고 시간으로 ‘酉時(유시)’는 오후 5~7시가 된다. 산업사회로 전환된 이후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은 동료 지인들과 어울려 소주를 마시는 시간, 하루 중 가장 의미 있어 보이는 시간, 기다려지는 시간, 어제 마신 주독이 사그라지고 재충전하는 시간, 그 시간이 곧 ‘술시’다.
‘술시’가 막 지나서 낯익은 전화 한 통으로 나의 걸음은 구도심 컴컴한 골목 동태탕 집에서 멈추어 섰다. 막걸리를 반주로 낙지 한 마리가 유혹하는 저녁을 먹었다. 시내버스 대신 다리 운동을 할 의도로 조명이 휘황한 금강 철교를 걸어서 건넜다. 여관이 즐비한 골목을 지나고 대학로 주변의 웅성거리는 주점을 거쳐 신관동 메가박스 앞에 섰다. 발길이 드문 영화관 앞 유독 나를 유혹하는 포스터 하나가 가슴에 꽂혔다. 며칠 전 왔다가 술이나 마시자는 지인의 주장에 그냥 돌아섰던 영화다. 한 영웅이 쇳덩이처럼 포스터 전면을 지배한 모습에서 이미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초등 시절 울고 웃던 영화관의 추억부터 기회만 되면 영화관을 찾을 만큼 영화관람을 좋아했다. 오늘의 영화관 안은 작년에 육군사관학교에서 한 독립 영웅의 흉상을 철거했던 세태를 반영이라도 한 듯 쓸쓸할 만큼 사람이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승강기에 올라탄 사람은 모두 4명뿐이었다. 영화 속에서 독립투사들이 반복적으로 “우리의 삶은 먼저 간 동지들의 목숨값이다.”라고 말하며 서로 독려하던 말이 자꾸 떠올라 오늘의 현실에 정말 화가 치밀었다. 밖으로 나오니 습한 기운이 코끝에 닿았다. 어둠 속에 제국주의 망령처럼 겨울비가 스며들고 있었다. 갑자기 술타령이나 하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인적이 드문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집에까지 걸어오는 길은 어둠이 골목을 내리누르는 듯 내내 터덜거리고 길바닥에 얼어붙은 것처럼 무겁고 우울한 걸음을 옮겨야 했다. 수없이 죽어간 영웅들의 헌신과 희생이 덧없어 보여 복받치는 슬픔을 진정할 수 없었다. 볼 위로 계속 흐르는 눈물이 차라리 빗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중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