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간장포럼 운영위원, 전 거창고등학교 교사)
무언가 정리되지 않는 상념 속에서 러시아에서의 첫날밤을 지내고 우수리스크의 발해 성터로 향했다. 발해 성터는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땅이 발해의 시작을 증명하는 발해 절터임이 1914년에 러시아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발해 성터와 농경지를 내 발로 밟으며 발해인들이 보았던 광활한 초원과 푸르른 하늘은 감탄사를 자아낸다. 누군가 틀어 놓은 '우수리스크 편지'라는 노래가 들린다.
“바람에/무겁게 강물에 내리고/강물은 유유히 대지를 적시네/갈대, 춤추니 바람, 오르네/그러니 그대, 수이푼 강물에 슬픈 눈물 떨구지 마오/아, 강물에 실린 바람 동해를 가리니/동만주 적신 두만강을 만나리니/아, 임은 역사를 잇겠다 하는네/아, 우리는 반도를 넘지 못하네/아, 강물은 바다를 서로 부둥키는데/그렇게 바람도 반도를 휘감아 고향 가는데/당신은 아직, 우리는 아직/바다를 반도를 잇지 못하네 잇지 못하네/바람을 역사를 잊지 않겠네 잊을 수 없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동상, 사진 황대권 작가
청나라 땅이었다가 지금은 러시아의 땅이 된 이 곳. 갈 곳 없는 조선의 유랑 농민들이 월경하여 자리 잡기 시작하던 1880년대 조선 말기에는 만주족이 비워 두어 무주공산이었던 이 곳. 그 후 중국과 러시아로 국경이 정해지면서 함께 넘어온 조선의 유민들이 한쪽은 조선족이 되고 한쪽은 고려인으로 불려지는 이 땅에서 더 멀리 발해의 역사를 더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마는, 더 현실적인 문제는 여전히 이 땅에는 그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연해주 한인사회의 중심지는 블라디보스톡이 아니라 우스리스크이다. 19세기 후반부터 꾸준히 이주하다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기념비가 세워진 독립운동가로 최재형, 이상설이 있다. 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고려인문화센터)과 발해 유적지도 여기에 있다. 우스리스크의 한인 농장은 땅이 넓고 주로 콩과 옥수수를 기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곳의 농장이 전 세계를 통털어 비유전자조작작물(NON-GMO)을 기른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여기서 생산된 콩을 다 수입해도 국내 콩소비량의 10%를 넘지 못한다. 우리가 먹는 콩 관련 식품 의 90%는 GMO 콩이라는 뜻이다.
독립운동가 이동휘와 그 동지들의 비의 먼지를 닦아주는 회원들, 사진 황대권 작가
이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역사를 모아놓은 ‘고려인문화센터’로 간다. 한국의 시민단체 동북아평화연대와 고려인 단체가 함께 만든 기념관이다. 여기에 신문 발행(러시아어), 한글 교실, 노인단, 예술단 등의 사무실이 있고 ‘고려인이주역사관’이 있다. 이곳 고려인들은 피가 섞여 외모가 다를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우리말을 못한다. 그들을 묶어주는 것은 말과 글이 아니라 유전자에서 유전자로 전달되는 입맛이다. 그들이 지키고 잊지 않으려고 한 것은 음식이었다. 간장과 된장을 먹으며 한민족의 혼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연해주에서 사시는 고려인 대부분이 연변 된장 축제에 참석하고 백두산으로 여행을 갔기에 고려인들이 사는 마을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우정마을에 사시는 제주도 출신 귀촌인이 우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출생한 고려인 3세 김 발레리아 한국인학교 교장샘은 "집시 아이들도 자기 민족 말을 하는데 우리는 말을 할 수 없다."라는 슬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2019년에 학교를 건립했다고 한다. 연해주 한인사회의 중심에는 김현동 선생과 주인영 '바리의 꿈' 이사장이 있다. 이들이 이역만리 여기 연해주에서 고려인들과 함께 콩을 심고 장을 담그며 민족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