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67. 소중한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10.11 07:27 의견 1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 교사)

예전에 큰이모부가 아버지랑 술을 드시면서 “이보게 뭐 하는 거여? 술잔에 먼지 앉겄구머언”하셨다. 빨리 마시라는 뜻이었다. 버스 기사님께 “00가는 거 맞나요?”라고 물으니 “타야 가쥬~”하신다. 손님이 승차하며 차 문을 세게 닫으니 택시 기사님이 “그걸로 문 부서지겄슈?”라고 한다. 충청도식 화법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겹 밑에 감추고 있어 강한 전달력을 갖는다. 모호하고 애매하게 말하기로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거나 회피하려는 술책을 탓하며 진솔하고 명쾌한 화법을 칭찬하지만, 때론 저런 말하기가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주고 삶에 여유를 주기도 한다. 위와 같은 대화에선 잠시 생각한 후 다다른 결론에서 비로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생기를 띠고 즐거워진다. 무료하고 하기 싫은 일이 있다면 적용해 볼 수 있는 전략이다.

진로 수업을 포함해 하루 예닐곱 시간의 수업을 하는 아이들에게 매 순간의 수업이 기대에 충만하고 즐거운 상태에서 이루어질 순 없다. 오늘도 아이들은 왜 이걸 배워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교육과정이 제시하는 내용들을 습관적으로 따라오고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학교 밖에는 빠르고 강한 자극들이 매 순간 아이들을 유혹하고 손안에서는 10초 단위의 영상이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해보자고 목표를 제안하고 45분 동안을 가르치는 건 지루하고 고된 일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때때로 저 위의 충청도식 화법을 활용해 본다. 수업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를 직접 제안하지 않는 것이다. 한 시간 동안 배울 내용을 단원 제목 정도만 제시하고 활동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게끔 하려는 시도인데 은연중에, 알게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그리고 시나브로 무언가를 터득할 때 효과가 더 큰 경우가 많은 걸 경험하고 있다.

2025년부터는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된다. 이에 따라 중학교 진로 수업을 3학년 2학기로 배치한 경우가 늘고 있다. 이를 일명 ‘진로 연계 학기’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주변 고등학교들이 어떤 교육 과정 속에서 운영되고 어떤 선택 과목을 가르치는지 미리 알아보는 일은 새로운 제도 속에서 순조로운 고등학교 생활을 위해 필요한 활동이다. 그러나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 실시하는 진로 수업은 1학년 때의 그것에 비해 확실히 긴장이 덜하고 활력이 떨어진다. 입학한 지 2년 반이 지나니 아이들은 어느새 늙다리 같은 모습을 보이며 수업 시간에도 수동적으로 임하기 일쑤이다. 따라서 가급적 활동 중심, 학습자 중심의 수업을 진행해야 좋은 수업을 유지할 수 있다.

고교학점제에서는 자신이 진학하고자 하는 학과 또는 계열을 위해 어떤 선택 과목을 들어야 좋은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하여 자신의 진로·진학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중학교 과정에서 대학 학과를 정하는 게 힘들다면 보다 넓은 계열이나마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알아낸 관심 계열과 학과는 분명히 학생들의 진로 파악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제 진학하고자 하는 계열과 학과에서 무엇을 배울지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는 시간을 더한다. 일명 ‘희망하는 학과 교육과정 살펴보기’이다. 이때 수업의 타이틀만 정하고 활동을 통해 무언가를 터득하게 한다. 시작은 ‘가고 싶은’ 대학의 홈페이지 방문이다. 아이들에게 강조한다. 결코 ‘갈 수 있는’ 대학을 찾는 게 아니라 ‘가고 싶은’ 대학을 찾는 거라고. 꿈과 희망은 현실을 이겨내게 하는 원동력이다. 대학 홈페이지에서 자신이 관심 있는 학과 홈페이지로 들어가는 방법을 안내한다. 학교별로 상이하기에 도움이 필요한 아이는 함께 찾아준다. 아이들이 대학의 계열이나 학부로 들어가서 드디어 학과의 홈페이지까지 찾아가는 그 짧은 여정 자체가 구체적인 학과 탐색 과정이다. ‘은연중에’ 아이들은 자신의 학과가 연관된 대학과 계열을 터득한다.

활동 1의 제목은 ‘원하는 학과와 대학 정하기’이다. 이어지는 제시 사항은 ‘원하는 학과를 정해봅시다.’이다. 그리고 작성할 표에 대학, 관심 학과, 전공 소개, 졸업 후 진로와 자신이 맘에 드는 분야를 넣는다. 활동 2는 ‘관심 학과 교육과정(커리큘럼) 조사하기’다. 학과의 교육과정을 찾아보고 약식으로 50학점 정도만 완성해 보는 작업이다. 역시 제시 사항은 ‘아래 표에 50학점 이상이 되도록 정리해 봅시다’이다. 무얼 해라, 마라 할 필요 없이 활동지 양식과 태블릿 PC를 던져주면 아이들은 집중하기 시작한다. 놀라운 건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아 왔던 상황이 역전되어 어느덧 아이들은 마치 그 대학의 학생이 된 듯한 표정으로 활동에 몰입한다는 사실이다. 매일 대학, 대학 하지만 실제로 좋아하는 학교 홈페이지 한번 방문해 볼 일이 없는 게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활동지의 마지막에는 간단한 느낀 점을 쓰는 란을 둔다. 약학과에 가고 싶어 조사를 했는데 예상보다 다양한 과목을 배운다는 사실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는 얘기, 막연하게 가고 싶은 학과였는데 배우는 과목들을 보니 기대 이상이라며 확신이 생겼다는 얘기 등 긍정적인 반응이 많다. 아이들이 적은 느낀 점이 이 수업이 지향하는 목표였음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은연중에 알았을 테니까.

직업인 가상 인터뷰 작성도 그렇다. 흔히 나의 직업 멘토(또는 롤모델)는 누구인가? 그렇게 선택한 이유는? 멘토(또는 롤모델)처럼 되기 위해 준비할 사항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 사항은 학습 목표를 너무도 구체화한 지시 사항이다. 그런 내용을 감춘 채 건조한 활동명을 제시한다. 활동 1은 ‘관심 진로 멘토 정하기’이다. 표 안의 내용은 자신의 관심 진로, 멘토 이름, 그리고 약력 등이다. 활동 2에는 관심 진로 멘토와 하는 가상 인터뷰 시 활용할 질문지 작성이다. 그리고 마지막 활동은 진로 멘토와 나누는 가상 인터뷰를 대화체로 작성해 보기이다. 대화 중 반드시 멘토가 자신에게 해줄 조언을 쓰도록 한다. 인터뷰가 작성되면서 아이는 멘토 선정의 이유를 그 안에 녹여낸다. 질문지를 작성하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와 조언을 그려낼 수 있다. 이게 ‘직접 써보세요’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이런 장면도 있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를 적어 보세요’ 하면 부담스러워 선뜻 쓰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럴 땐 ‘사람들이 공부를 하는 이유를 적어보세요’라고 객관화된 견해를 먼저 쓰게 한다. 활동지에는 없는 지시이지만 수업 중 교사가 추가로 다음과 같이 말하면 된다. “이제 작성한 내용 중에 자신이 공부를 하는 이유를 체크해 보세요, 더 있다면 추가로 써도 됩니다”. 이런 객관화 과정이 에둘러 자신의 견해를 파악하게 해준다. 비슷한 경우로 진로 수업 중에 자신의 입장을 손들게 해서 집계를 내곤 한다. 예를 들어 ‘대입 수시모집 전형 중에 자신에게 제일 유리한 것은 무엇일까요?’라고 손을 들게 하여 집계한다. 이때도 빠뜨리면 안 될 물음은 ‘그렇다면 학년 전체 친구들이 제일 손을 많이 든 것은 무엇일까요?’이다. 이 또한 해당 수업 내용을 은연중에 주‧객관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

졸업한 여학생 중 한 명은 1학년 때 현장 직업 체험활동에서 ‘조향사’가 되는 체험을 하고 해당 직업인과의 만남을 가졌는데 이때부터 향수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향수를 제작하는 화장품 회사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유명 화장품 회사에 입사하여 직접 향수를 제작하려면 관련학과로는 화장품학과 등이 있는데 조사를 해보니 거의 화학공학과에서 배우는 내용을 듣는 걸 알게 되었고 이후에 화학 공부와 이공계 진출을 위한 진로·진학 로드맵을 작성, 수학과 과학 공부를 열심히 하는 계기를 얻었다. 실제로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는 그 학생과의 상담은 진로 체험이 어떻게 유의미한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지 귀감이 될 사례였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아이에 대한 평판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하는 학생임은 맞으나 수업 시간에 자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면 으레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고, 본인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활동에는 성실히 임하지 않았다.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는 선생님에게는 차가운 반응을 보이는 등 말본새와 맵시가 예쁘지 않은 학생이었다. 그런 학생들이 종종 있어서 선생님들을 아쉽게 한다. 무심한 듯 의도치 않게 진행된 활동에서 은연중에 자신의 진로 목표를 깨닫게 되어 활동이 추구하는 이상에 부합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 아이와 같은 부족한 덕과 품성은 어떤 활동으로 시나브로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 생활 지도 영역에서는 특히나 직접적인 지시와 훈육보다 꾸준한 애정과 관리가 우선한다는데 정작 보일 듯, 말 듯하며 지속적으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챙겨주어야 할 끈기는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는 느낌이다. 솔직히 체력과 의지력의 빈곤도 한몫하기에 그런 성향이 심해진다고도 본다. 지적 활동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학생의 됨됨이를 바르게 하는 영역에서도 ‘은연중에’ 좋은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성과 열정이 커지길 바란다. 학습 활동보다 훨씬 중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에 하는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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