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영화배우 벤 스틸러는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로 주목을 받고, 「미트 페어런츠」로 큰 웃음을 주다가 급기야 「피구의 제왕」, 「트로픽 썬더」의 황당한 B급 유머까지 소화하고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에서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즐거움을 선사한 배우이다. 올해 나이 58세인 그의 영화들 가운데 대부분의 코미디 영화도 좋지만, 가끔씩 나오는 진지한 영화를 나는 더욱 좋아한다. 직접 메가폰을 들고 주연까지 맡았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는 나뿐만 아니라 현실에 지쳐있던 많은 사람에게 잔잔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 영화이다. 지금도 그가 회사 문을 박차고 그린란드로 떠나는 장면을 보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씩씩한 감흥이 일어난다. 그런 그가 2022년에 삶과 인생에 관해 차분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영화에 출연했는데 무심코 봤다가 좋은 느낌을 받았던 그 영화는 바로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이다.
주인공 브래드는 비영리단체에서 기금 모금을 하며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소신 하나로 살아오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퇴사를 결심한 후배 직원의 말을 듣고 좌절한다. 그 말은 “솔직히 돈 달라고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것보단 제가 돈을 많이 벌어서 기부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라는 고백이었던 것. 세상에 옳은 일을 한다지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활동에 저 말은 가장 약한 고리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문제는 SNS였다. 대학 때 자기보다 못났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사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잘나가고 있거나, 엄청난 부를 얻어 개인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아예 은퇴하여 섬 하나를 사서 젊은 여자들과 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런 친구들과 비교할수록 자신만 시골 구석에 처박혀 패배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며 우울해진다. 그러면서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만든 여러 핑곗거리를 찾는다. 못나게도 처음으로 떠올린 건 사랑하는 아내였다. 성공한 친구들의 아내는 친구들 못지않게 성취동기가 크고, 집념이 강해서 남편이 평범한 삶을 살려고 하면 끊임없이 자극하고 긴장하게 만든다. 게다가 재산도 많다. 그에 비해 자기 아내는 그저 자신이 하는 일을 믿어주고 안심시키며 편하게만 만들어 준다. 좋은 파트너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기회를 잃게 했다고 원망하다가 스스로도 못났다고 여겨졌는지 이내 고개를 저어 본다. 하지만 곧이어 장인 어른이 남겨 줄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물으며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입학을 앞둔 외아들이 이 모든 좌절을 한방에 뒤집어 버릴 말을 한다. 바로 ‘진로 선생님이 그러는데 자기 정도면 ‘하버드’에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다. 그러면 그렇지! 자신감을 얻은 브래드는 이어 부유한 친구들이 자녀 교육은 엉망으로 해서 마약을 하거나 버릇없는 아이로 키웠을 거라고 신포도 우화를 시전하며 즐거워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인생이 드디어 빛을 본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인상 깊었던 건 우리와는 대입 경쟁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여겨왔던 미국 사회에서도 자녀가 일류대에 들어가는 걸 인생 역전으로까지 여기는 부모가 있겠다는 생각을 간접적으로나마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부모 마음은 똑같구나,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다를 게 없겠구나, 그런데 우리나라만 유독 입시 경쟁이 치열하고 교육 환경이 엄혹하다는 평가는 왜 그런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후, 미국의 대학 입학이 실제로는 어떤 분위기인지 알고 싶었다.
이 궁금증에 현실적 대답을 해줄 사람이 멀리 뉴욕에 살고 있다. 바로 나의 처제이다. 미국 생활이 어언 20년이 넘어 작년에 첫째 아들을 유명 공대에 입학시켰다. 가족에게는 경사였다. 현재 처제는 뉴욕 Staten Island에 살고 있다. 지역 특성은 비교적 번잡하지 않은 주택들이 주로 있는 곳이다. 한인 교포들의 교육열은 인근 뉴저지주에 비하면 다소 약하다고 한다. 생일도 아닌데 뭔 전화냐고 형부를 멋쩍게 만든 건 셋째 딸다운 경쾌함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끼리의 인터뷰지만 뉴욕 사회의 한인들과 대학 입시 현황을 알아보려는 나름 비장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인터뷰하기 전에 정리한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1. 미국 한인 교포들의 입시 문화와 전반적인 풍토는?
2. 대학에 입학한 조카는 처제의 도움이 없었다고 해도 대학에 잘 갈 수 있었을까?
3. 한인 교포들이 입시 경쟁 스트레스를 미국에서조차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4. 미국 대입의 특징을 볼 때 처제의 어떤 도움이 좋은 성과를 이끌었다고 보는가?
5. 입시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과 한국 중 어디가 더 쉬울 것 같은가?
6. 학벌의 압박이 미국 사회에서도 느껴지나?
7. 만일 큰 조카가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였다면 어떤 방식의 교육을 했겠는가?
답변을 정리해 본다. 먼저 처제는 소위 극성스런 학부모는 아니었다. 아들이 어려서부터 알아서 공부를 했고, 지역의 과학 중심 명문 고등학교에 주로 아시아계 아이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했으며, 고등학교에서도 스스로 잘하는 아이여서 큰 관심은 안 가졌다고 하는데 이점은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경우라고 본다. 제일 바람직한 모습은 애들이 알아서 자기 공부를 하고 부모님은 격려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처제는 대학을 정할 때 워낙 정보가 많고 복잡해서 그 가운데 최선의 선택을 도와주지 못한 점에 미안해했다. 조금 더 많은 정보를 미리 알고 전략을 세웠더라면 아이를 보다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며 아쉬워했는데 이때 필요한 정보들은 한국에서 대학에 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대학마다 요구하는 서류가 너무 다양하고, 학비와 장학금 여건이 천차만별이며 졸업 후 전망도 다양해서 너무도 복잡한 내용들이었다.
통상 1년에 10만 불 가까운 학비가 미국 대학에는 높은 진입장벽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일단 합격해도 어떻게 학비를 마련하느냐는 큰 고민거리일 수 있다. 대학에 가려는 경쟁은 미국 사회에도 나름 치열하다고 했는데 특히 한국 교포를 중심으로 아시아계나 인도계에서 이 현상이 강하다고 했다. 미국에도 우리처럼 학원이 있고, 지역에 따라서는 성업 중이라고 한다. 특히 9학년(우리나라 고1) 때는 대학을 가기 위해 필요한 커리큘럼이나 세미나 등을 준비해 주고, 시험을 대비해 주며 다양한 정보들을 챙겨주는 일명 대입 컨설팅 등을 많이 활용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익숙해진 대입 컨설팅 등의 사교육 서비스가 미국에도 활발하다는 얘기다(아니, 어찌 보면 원조일 수도 있겠다). 에세이 작성이나 SAT 준비 등을 위해서 일정 기간 학원에 다니던지 개인 교습을 받은 적이 있지만 우리의 경우처럼 방과 후 줄곧 학원에 다니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건 미국 대학 입시가 단기간에 몇 가지만 준비해서 가능한 게 아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풍토이다. 큰 조카만 하더라도 스포츠 활동이나 음악 연주 등 각종 활동(activity) 들이 다소 부족해서 걱정이었다고 한다. 저런 모습들은 우리나라가 도입한 입학사정관제(현 학생부 종합전형)가 추구하는 원형(原形)이 아닐까 싶었다. 대학별로도 선발 기준이 다양하고 학생들 나름대로 준비할 영역이 다양해서 몇 가지 기준을 들어 단순화할 수 없는 선발 방식, 그 복잡성이 우리나라에서는 분명히 공정성 시비를 낳을 게 뻔한 것이라 나라의 문화적 차이는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여금 입학이 허용되는 미국에서 2019년에 터진, 일명 ‘옆문 입학’이란 말이 만들어지게 된 바시티 블루스 스캔들(Varsity Blues Scandal)은 상류층 부모들 33명을 포함한 50여 명의 관계자들이 기소된 대형 입시 비리 사고였다. 예일, 스탠퍼드, UCLA 등의 명문대를 입학한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비리 금액도 총액 2,500만 불에 달하는 사건이어서 큰 화제가 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 미국 대학 입학 제도에 관한 불신이 더욱 크다고 한다. 그러나 복잡하고 다양한 입학 전형 방식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 특성이 때론 미국 교육과 대학 입시의 장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제와 얘기를 나누면서 미국이 부럽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국가나 사회의 규모가 워낙 크니 삶의 유형과 가치관도 다양하고 대학의 특성도 다양해서 이른바 서열화하고 싶어도 쉽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저래 풍요로운 환경이니 가능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딜 가나 뜨거운 교육열을 잃지 않는 우리 한민족의 정서 또한 동양인들의 그것과 대부분 비슷한 측면이 있고, 인종을 불문하고 상류층에서는 교육열이 뜨거운 만큼 유별나다고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학벌의 압박도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어서 만일 아이가 공부를 정말 싫어했다면 그래도 2년제 대학에 해당하는 community college 정도는 가라고 했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기술직에 대한 우대가 분명히 있고 서로 비교하지 않고 자기 삶의 기준이 뚜렷한 점은 입학 경쟁에서 좀 더 유연하고 여유 있는 분위기를 만들게 하는데 분명한 이유가 된다고 보았다. 핵심은 각자의 가치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다양성’에 있다는데 처제와 나는 공감하였다.
비싼 학비, 복잡한 대학 입학 정보, 세심한 도움과 지도를 받을 수는 없는 막막함, 상대적 박탈감을 일으킬 수 있는 특례 입학 제도 등 미국 대입 제도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냐, 한국이냐, 어디가 좋을지를 묻는 마지막 질문에 처제는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형부, 전 한국에 있었으면 더 불안해서 지금처럼은 못 있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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