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59. 드디어 개학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8.16 07:47 의견 0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시간이 거짓말처럼 흐른다. 방학식 하는 날 이미 예견했던 순간이다. 그날부터 얼마나 시간이 빨리 흐를지 수많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방학하기 전 일주일 정도가 가장 행복한 날들이다. 이미 그것이 시작된 순간부터 시간의 표정은 확연히 달라지니까. 학창 시절부터 수많은 방학을 경험하건만 솔직히 한 번도 만족스러운 적은 없었다. 이제 개학을 맞아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보면 또 걱정이다. 어떤 안부로 개학 인사를 마련해야 할지, 그 덧없고 먹먹한 낱말들의 나열이 한나절을 맴돌 게 뻔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나 선생님이나 방학 전에는 다들 원대한 계획을 하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거나 앞서 배울 것들을 예습하는 학업 계획이 제일 우선일 것이고, 그다음엔 책을 읽거나 무엇을 배우는 일, 여행을 가거나 봉사활동 등을 하면서 무언가를 체험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교직의 매력으로 가장 크게 인정받는 게 방학이기에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보내는지는 선생님들에게 중요한 숙제다. 방학에 잘 쉬지 못하거나 의미 있게 보내지 못한다면 다른 직종에서 부러워할 큰 매력을 놓치게 되는 일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선생님들에게 방학은 일반적인 휴가라고 불리는 것과는 차원이 많이 다른 계획이 필요하다.

그동안의 방학 계획들을 떠올려 본다. 약 한 달 안팎의 방학 동안 많은 일들을 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이어졌다. 우선 신학기를 위한 새로운 수업 방법을 연구하겠다고 다짐한다. 시도해 보지 못했던 다양한 수업 모델을 기획하고 새롭고 참신한 수업이 없는지 탐색하고 고민한다. 아이들에게 행할 생활 지도나 대화의 방식을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살펴보고 대비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에 따라 다양한 연수를 검색한다. 아울러 신학기에 전개할 학교 업무나 행사에 도움이 될 아이템 등을 고민하고 준비하겠다고 다짐한다.

학교 일만 떠올리면 방학이 너무 아깝다. 멋진 국내외 장소를 탐방하고 좋은 경험을 하겠다는 여행을 계획한다. 해보지 못했던 취미 활동이나 운동을 시도해 보겠다고도 다짐한다. 그동안 미뤄왔던 책과 영화를 왕창 읽고 보겠다고, 못 만났던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보겠다고, 바쁘다고 못 챙겼던 가족에게도 무언가를 해주고, 학기 중에 돌보지 못했던 건강도 돌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렸을 때 방학을 앞두고 동그란 시간표에 빽빽하게 그리던 계획이 어른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으니, 그때처럼 언제나 실패하고 멋쩍은 개학을 맞이한다. 무리한 계획이란 걸 안다. 그래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다 알지만 피할 수 없다. 계획 자체가 주는 위안 때문이다.

만일 그런 계획이 없다면 어떤 방학이 될까? 더 이상 계획한 바를 못 이뤄 아쉽지 않으려고 이번 방학은 아무런 계획이나 기대 없이 시작했다. 철저하게 무계획 속에 최초로 방학을 보낸 후 결론은? 계획할 때와 크게 다름없는 방학이었다. 여유 있는 시간에 책을 읽고 영화를 봤으며 미뤄왔던 검진을 했고 아픈 부위는 치료하고 있다. 가족 모임을 했고, 친구와 동료들을 만났다. 개학 후 할 수업을 군데군데 살펴보고 정리했다. 몇 가지 설명회와 연수에 참여하며 연찬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덧 개학이다. 단, 너무 더운 날씨를 핑계 삼아 평소에도 잘 하지 않았던 여행을 가지 않았다. 지나친 폭염은 집돌이에게 돌아다니지 않을 핑계로 좋았다. 물론 작은 반경의 이동은 없지 않았다.

만일 해외에 나갔다면 기억에 남는 일은 좀 더 많았을 것이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전면 시행된 1989년 이전에는 여권을 만들고,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게 엄청나게 힘든 시절이었다고 말하면, 그런 시절이 있었냐고 젊은 세대는 깜짝 놀란다. 35년 전에는 지금 우리가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체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등 일명 동구 유럽의 나라들을 포함해 러시아(당시 소련), 중국(중공) 등의 공산주의 국가들을 여행할 수 없었다. 마치 지금의 북한처럼 말이다. 그때의 감정을 느끼려면 구소련에서 탈출했던 무용수가 비행기 불시착으로 다시 소련에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백야(White Night)’를 추천한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전면적인 국경 개방이 이뤄졌고 제일 먼저 록 음악과 코카콜라, 맥도날드가 그곳에 들어갔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건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록 기타리스트 잉베이 말름스틴의 공연(1989년)과 같은 해 록 밴드들이 모여서 만든 모스크바 평화 음악 축제의 감동이다.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경우 공산 진영의 국가들에 관한 긴장과 우려가 짙었기에 그런 변화가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여행이 갖는 순 작용과 의미가 크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해당 국가의 사람들과 편히 소통할 수 없는 언어의 장벽 속에서 이른바 유명 명소를 찍고 다니며 맛집을 주로 탐방하는 여행에 해소하기 어려운 갈증이 있었다. 그렇기에 장소와 음식이 주는 감동보다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언가를 느끼고자 하는 여행의 의미는 아직까지 쉽게 충족되지 않은 아쉬움이다. 그래서 여행을 기피한다. 아이들과 상담하면서도 적성 영역에서 공간지각능력이 약한 아이들 중에 흥미 유형에서 현실형이 낮은 친구들에게 여행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나와 같은 성향을 자주 보인다. 따지고 보니 어려서부터 길치였는데 어디를 가다가 구박을 받거나 긴장하면 당연히 이를 회피할 가능성이 커지고 거기다 현장에서 무엇을 추구하는 유형이 아니라면 그런 성향은 더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여행에 굳이 목매는 사람이 아닌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나와 비슷한 성향의 아이를 만나면, 그렇지?! 하면서 내담자인 아이와 함께 낄낄대곤 한다. 그러면서 최근의 여행 문화와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한다.

우리 사회는 쏠림이 크다. 대부분의 사람이 무언가를 추구하면 그게 당연하고 꼭 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의 사회, 언제부턴가 여행도 그런 항목이 되었다. 문제는 그러한 쏠림에 은연중에 계층의 구별을 담는 풍토다. 거기에 소외와 편견이 생긴다. 일명 ‘너 그거 해봤어?’에 속하지 못할 때의 아쉬움과 서러움이다. 현장체험학습은 출석이 인정된다는 분명한 사실에도 ‘개근 거지’라는 말을 퍼 나르며 그런 분위기를 자극하는 언론과 매체의 불성실과 기만 역시 묵인할 수 없다. 그런 분위기에서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경쟁을 부추겨 왔다. 안타깝게도 배제에 따르는 불안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부정적이지만 강한 에너지이다. 그래서 이번 개학에는 어디 다녀왔냐는 질문을 최대한 자제하려 한다.

계획이 없는 방학이 저물어 간다. 수많은 포부와 기대로 계획했던 방학과 크게 다른 게 없었던 날들이 또 한켠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무계획의 방학을 겪으면서 예전 방학에 고민한 계획들이 결국엔 내 삶의 부족한 결핍이거나 바람들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상당 부분 이뤄지지 않을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때의 계획은 그래서 나름의 가치를 갖는 것이라고 본다. 마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일정한 계획을 실행하는 농부처럼, 살아가면서 만나는 시의적절한 행위의 의미일 것이다. 개학을 하면 아이들에게도 무언가 계획한다는 수고가 갖는 가치를 좀 더 여유롭게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지킬 수 없다고 크게 낙담하지 말고, 계획하는 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고. 자신이 무엇을 부족하게 여기며 무엇을 바라는지 확인하는 일, 계획을 세우는 그것도 살아가는 과정 안의 일부일 뿐이라고.

출처: 도토리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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