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진주고등학교 교사)
월요일 아침은 아무래도 마음이 바쁘다. 아마도 오래된 관행 탓일 가능성이 큰데 딱히 그것을 타파해야 할 이유가 없어 바쁜 마음에 맡겨 두기로 한다. 아침을 먹고 빠르게 움직여서 출근을 했다. 출근하면서 도대체 무엇이 월요일 아침을 바쁘게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는 없는데 마음은 바빠진다. 역으로 뒤집어보면 바빠져야 할 아주 세세한 이유는 많지만 그 가닥 하나하나를 우리는 모두 감지해내지 못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일상을 살아가는 내 마음의 모습이 대부분이 이러하다. 아마도 ‘노자’도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서 생각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도덕경 14장 일부)
즉, (도는 – 주어가 빠졌다.) 보려(생각이나 의지를 가지고) 해도 볼 수 없으니, ‘이(夷 – 여기서의 의미는 平에 가깝다. 특별하게 튀어나오거나 드러난 부분이 없다는 의미이다.)’라 하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으니, ‘희(希 – ‘희미하다’의 의미 그대로이다.)’라 하며, 잡으려 해도 너무 가늘어서 잡을 수 없으니, ‘미(微 – 가늘다, 혹은 아주 작다 라는 의미로 해석)’라 하네. 이 세 가지는 하나씩 따로 따질(힐詰은 본래 묻다, 혹은 하나하나 따져 묻다의 의미인데 여기서는 이 의미에 가깝다.) 수 있는 게 아니니 섞여서 ‘하나’가 되었다.
볼 수 없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찾을 수 없음인데 이를 테면 특정 형체를 확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비유일 것이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감각의 범위 밖에 있는 상황, 즉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감지해 낼 수 없는 상황을 말함이다. 微 역시 그러한 상황을 이야기한다.
이 상황을 도올은 ‘the holistic whole’이라고 명명하였다.(김용옥,《노자와 21세기》(하), 통나무, 2000, 158쪽.) 말하자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니 이렇게 분류되는 것이니 차라리 뭉뚱그려 ‘하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라는 말은 개념적 인식으로 분석되기 이전의 ‘온전한 전체’라고 보자는 것인데 도올 다운 해석이다.
어쨌거나 노자는 이 말을 부연敷衍한다.
其上不曒,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도덕경 14장 일부)
(故混而爲’一’이 된 이 ‘하나’ 즉 ‘도’는) 그 위라 해서 밝은 것도 아니고, 그 아래라 해서 어두운 것도 아니네. 이어지고 또 이어지니, 무어라 이름 할 수 없네. 무물(無物 - 만물이 드러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네.
교曒는 밝다는 의미인데 왜 ‘밝다’라는 의미를 가진 다른 많은 글자를 두고 이 글자를 사용했을까? 교는 明처럼 완전히 밝은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다. 날 日과 해 그림자(日影) 약(敫)이 합쳐진 형성 글자인 曒는 주변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명백해 보이는 상황은 아닌 즉 어둡지는 않은, 다만 환한 상황을 말한다. 즉 도의 위가 그러하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도의 아래는 어둡지 않다(不昧)로 표현된다. 즉 도의 위와 아래는 비슷한 밝기이니 위도 아래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를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승승불가명(繩繩不可名)은 아마도 노자의 마음 깊숙하게 자리 잡은 세상에 대한 인식의 기초였는지도 모르겠다. 도덕경 제6 장에 ‘면면약존綿綿若存’과 같은 의미로 쓰였는데 이것은 바로 세상에 대한 인식이자 동시에 道의 존재방식에 대한 노자의 관점이다. 도는 강력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또 거침없이 발산되는 것도 아닌 '승승'(새끼를 꼬아 만든 새끼줄처럼 겨우 겨우)이나 '면면'(가늘고 가는 누에고치 실이 이어져 비단이 되는 것)처럼 유지되어 간다는 것이다.
월요일 아침 까닭 없이 바빠지는 마음과 ‘도’는 너무 멀지만 까닭 없는 그리고 알 수 없는 그 마음을 따라 천천히 오르거나 혹은 내려가다 보면 문득 그 옆이나 밑을 지나는 '도'와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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