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의 교육, 고교학점제에 대한 기우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6.26 06:41 | 최종 수정 2024.06.26 06:45 의견 0

김준식(진주고등학교 교사)

- 학생 맞춤형 교육을 통해 잠자는 교실을 깨울 수 있습니다.

- 미래 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기르기 위해 필요합니다.

- 학생 개개인의 다양성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합니다.(고교학점제 홈페이지, 고교학점제가 필요한 이유)

위 글은 고교학점제 홈페이지에 있는 고교학점제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 글이다. 이 글이 얼마나 근거 박약하고 허술하며 심지어 기만적인지 고교학점제가 시행되고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 교실에서 수업하는 교사들은 모두 알 것이다.(특히 잠자는 교실을 깨운다는 말에 분노까지 치민다.)

먼저 위 고교학점제의 필요성을 생각해 내고 이런 표현을 쓴 사람은 절대 현장 교사일 수 없다. 추정컨대 대학교에서 학문을 연구하시는 교수님, 교육개발원에 계시는 높은 직급의 공무원들, 그도 아니면 석•박사 과정에 있는 연구자들이 오직 자신들만의 이론에 기초하여 쓴 글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약 현장 교사가 이 글을 썼다면 세속적인 목적에 경도되었거나 아니면 고교 학점제가 시행되지 않는 학교에 근무하면서 오로지 추측성 낭만적 글쓰기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백하자면 나도 2019년에서 2023년까지 중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경상남도 교육청 산하 미래교육원에서 연구했던 많은 고교학점제 정착에 대한 여러 가지 논문 연구에 참여하였다. 심지어 몇 년간 그 논문에 심의까지 담당하면서 고교학점제에 대하여 매우 열심히 논의하여, 고교학점제에 대한 평균 이상의 이해도를 가진 사람이었다. 만약 내가 현장 교사, 그것도 인문계 고교 교사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정년퇴직까지 고교학점제에 대한 나의 평가는 위 필요성의 표현 수준 정도 이거나 혹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2023년 9월 진주시내 인문계 고등학교이며 교육부 지정 고교학점제 선도학교인 진주고등학교에 현장 교사로 돌아오면서 고교학점제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벽하게 무너졌다.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 교실과 3학년 교실에서 주당 16시간 수업을 하면 내가 느낀 학점제는 말 그대로 문제점 투성이 그 자체였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대입 수학능력 시험

고교학점제의 구체적 실행방법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위 필요성의 슬로건에서 보듯이 ‘학생 맞춤형’과 선택의 다양성을 위해 학생들이 과목 선택권을 가지는 것이다. 외견상 너무나 멋진 제도라고 생각할 만하다. 이 제도를 고안하고 설계한 사람들의 생각은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한 과목을 배우는(본인이 선택했으니 즐겁게 공부할 것이라는 착각) 창의적이고 멋진 교육이 살아 숨 쉬는 학교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제도를 고안하고 설계한 분들이 놓친 단 하나의 조건(그 조건이 가장 압도적인 조건이다.), 바로 이 나라에 있는 대입제도(구체적으로 수능)다.

고교학점제를 위한 고등학교 선택과목은 실로 다양하고 엄청나다. 내가 담당하는 사회과만 하더라도 3~4과목군별로 3~4개의 과목이 있으니 어림잡아 12개 정도의 교과가 아이들의 선택을 기다린다. 아이들은 과목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기초로 아이들을 선택과목별 A.B.C.D.E.F.G. 그룹으로 나누는데 쉬는 시간 10분 동안 교실을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한 학년에 8 학급 규모인 우리 학교의 복도는 매 시간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리고 아이들은 선택한 교실에서 선택한 수업을 듣는다. 그런데 대부분 잠을 청한다. 2023년 9월, 교장에서 교사로 돌아온 첫 달, 3학년 수업을 들어갔는데 수업 시작 후 10분도 되지 않아 아이들이 거의 잔다. 처음에는 이 상황이 너무나 이상했고 동시에 화가 났다. 이유를 모르니 답답하기만 했다.

10월이 되기도 전에 나는 이유를 알아버리고 말았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다양한 선택 과목 중에 한 과목)은 수능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과 그런 과목 수업시간에는 잠을 자거나 아니면 다른 과목 공부를 하는 시간으로 아이들은 이미 구조화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학년 때 이理과 과목(화학이나 생물)을 공부한 아이들이 3학년이 되어 비교적 용이하다고 소문이 나 있는 사회과 과목을 선택하는데(다양성이 보장되는 제도), 문제는 사회과에 대한 1, 2 학년 당시 선행 학습이 없는 아이들이라 모든 교과 내용이 생소한 수업이다. 또 3학년 선택 과목은 ‘진로 선택’(필수 선택은 이미 마친 상황)이라 아이들의 내신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진로선택 과목은 전체 내신 성적 평정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음) 사실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내 수업 시간에 자거나 다른 공부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어떤 위협도 설득도 의미가 없다. 이런 상황이 국영수를 제외한 3학년 대부분 교실(국영수라 하더라도 선택으로 풀린 과목은 예외가 아니다.)의 상황이었는데 이것이 고교학점제로 미래 역량을 키우는 교실이란 말인가!

2. ‘선’과 ‘악’

애당초 고교학점제를 고안하고 설계한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진보적 계열의 교육운동가들이었다. 아이들의 다양성과 창의성, 그리고 학교 수업의 개선과 다양한 교수 학습지도 모형의 확대를 목표로 이 제도를 설계했을 것이다. 지난 수년간 여러 학교에서 연구학교와 시범학교(연구학교와 시범학교 문제는 다음에 다시 쓰기로 한다.)를 거쳐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있으니 아마도 정책 담당자들은 제도의 문제점은 이미 최소화되었고 실행과 정착이 과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미 이 제도를 위해 학교 구조를 바꾸고 새로운 교실 공간을 위해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었다.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와 버린 고교학점제는 이제 고등학교 아이들의 삶에 큰 영향을 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제도를 한 번만이라도 시행한 학교 현장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지금 워낙 이 제도의 정착을 위해 교육부, 교육청이 거세게 몰아붙이기 때문에 현장 교사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지만 제도 시행을 통해 나타난 문제점은 너무나 많아서 글로 옮기기 조차 힘들다. 결정적인 것은 위 고교학점제의 취지와는 완전히 다른 교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거나 다른 공부를 하는 교실, 선택의 다양성은 선택과목의 수와 이름에만 있는 삭막한 교실이 되고 만 것이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는 대입시험, 즉 수능이 고교학점제의 가장 큰 걸림돌인데 대입은 이제 너무나 견고한 벽이라 감히 누구도 그 벽의 정당성이나 타당성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수능을 위해 12년을 달려온 인문계 고교의 학생들에게 현재의 고교학점제는 지금대로라면 거추장스러운 장식이거나 아니면 아예 장애물이 될 공산이 크다. 이런 복잡한 분위기가 현재 인문계 고교의 고교학점제 현장 상황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리 만무한 교육부나 교육청은 여전히 고교학점제 추진에 만전을 기한다는 원칙론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다. 수능과 고교학점제 두 제도 중에 하나를 취사 선택하라면 이 땅의 학부모 그리고 인문계 고등학교 아이들은 당연히 수능일 것인데 이 태도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아무리 선한 의지로 제도를 구상하여도 그 제도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을 피폐하게 하고 동시에 힘들게 한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라 악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정년이 코앞인데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같이 호흡하고 탐구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은 이제 가망 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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