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43. 기계와의 동행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4.26 06:19 의견 1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밀리터리 미드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부하들에게 부당한 가혹행위밖엔 할 줄 모르는 무능한 중대장 ‘소블’은 상륙작전을 앞둔 야전 훈련에서 미숙한 실력을 드러내며 좌천된다. 그 실력은 바로 독도법 미숙과 효과적인 매복 장소를 놓친 실수 등이었다. 쉽게 말해 지도를 잘 못 봐 길을 헤매기 일쑤였고 지형지물 숙지가 늦어 매복에도 실패해 모의 훈련에서 부대원을 몰살시키는 패배를 당한 것. 드라마를 보며 ‘소블’ 대위에게 감정이입이 컸다. 나도 남부럽지 않은 ‘길치’였기 때문이다.

어릴 때, 한번 가본 곳을 망설임 없이 잘 찾아가는 친구를 보면 왠지 멋있어 보였다. 흔히 길을 잘 찾아가는 어떤 사람의 뒷모습에는 자연스럽게 리더십이 그려진다. 그래서 그런 능력이 없는 나는 리더십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능력은 운전할 때도 같았다. 초창기에 지도책을 보며 목적지에 갈 때는 기본 두세 번은 길을 잘못 들어서 함께 동승한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아내에게도 늘 면목이 없었다.

이런 나를 도와주는 강력한 기계가 나왔다. 바로 ‘내비게이션’의 등장이다. 그러나 난 ‘길치’ 이전에 약한 수준의 ‘기계치’이다. 거기다가 소비하는 재미를 모르는, 좋게 말하면 ‘미니멀리스트’이고 나쁘게 말하면 만사가 귀찮은 게으름뱅이다. 길치를 도와줄 구세주로 등장한 내비게이션을 나같은 사람이 안 사면 누가 사겠는가? 하지만 구입을 미루고 또 미루며 길을 헤매는 나를 보고 몹시도 딱하게 여긴 친구는 본인이 다니는 회사에서 기한이 넘어 남아도는 내비게이션을 못 참겠다며 선물했다. 문제는 이 기계의 버벅거림과 나의 사용 미숙이었다.

무엇이든 한 가지보다는 두세 가지의 결합이 더욱 강력한 법이다. 이건 부족함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길치’에 ‘기계치’의 조합은 어떨까? 친구가 준 내비게이션을 원만히 활용하는데 서툰 나는 어쩔 땐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할 무렵이 되어서야 기계가 정상 작동되는 경우를 겪으며 역시 함께 동승한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비난을 들었던 일이 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켜지는 내비게이션이라니! 우리는 기계와 기술의 도움 없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미래에 아이들이 겪을 일과 직업의 세계에 그것들의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며칠 전 기획 회의에서 스마트 워치를 수거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 있었다. 우리 학교는 이미 휴대폰을 걷는다. 휴대폰을 제출했지만 스마트 워치로 메시지를 보내고 검색을 하는 등 재미를 보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이다. 결론은 휴대폰처럼 수거는 하지 않되 수업 중 스마트 워치를 이용하거나 불미스러운 행위를 하면 압수할 수 있고 애초에 학교에 갖고 오지 않도록 계도하자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마도 학부모 입장에서는 스마트 워치도 휴대폰처럼 아예 걷는 데 찬성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학생들은 반대일 것이다.

일론 머스크가 ‘뉴럴 링크’를 만들어 인간의 뇌에 칩을 이식한다는 BCI(Brain-Computer-Interface)를 구현하고자 노력 중이지만 현대인들은 이미 손에 스마트 폰을 놓으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스마트 폰은 확장된 신체의 일부이다. 학교에서도 수업 시간에 활용할 목적으로 나눠줄 때가 있다. 아이들은 잃어버린 자신을 만난 것 마냥 좋아한다. 스마트 폰은 수거를 하지만 태블릿 PC는 근사한 충전 케비넷에 넣어두고 1인당 하나씩 수업 중에 활용케 한다. 학부모님들은 오랜만에 아이들 교실을 방문하면 새로운 교보재와 교실 내 장치들에 놀라실 가능성이 크다.

지난주에는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기반 맞춤형 학업 성취도를 보았다. 무려 네 시간에 걸쳐 태블릿 PC로 시험을 치렀다. 이제 더 이상 문제지를 공수하고 답안지를 수거한 후 채점하는 일이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종이를 넘기며 지문에 줄을 치고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시험이 그리워질 뻔했다. 종이 시험이 더 편한 사람 손들어 볼까요? 하니 많은 아이들이 손을 든다. 그래도 이게 대세가 될 것 같다. 4교시 동안 큰 문제 없이 무난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 평가에는 맞춤형이란 살가운 말을 붙였지만, 결국 일제식 학업 성취도 평가이고 학생들 개개인의 데이터는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될 것이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향상시키려는 관리인지, 과연 학업 능력 확인이 우리 사회에서 이런 예산과 노력을 긴히 요하는 다급한 영역인지 되묻고 싶었다. 공부에 관심 있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처럼 금방 알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평가와 측정은 본(本)이 아니라 말(末)이라는 생각이 강해서 또 다른 본말의 전도처럼 느껴졌다.

기계와 기술의 발달에 맞설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미 ‘러다이트(Luddite)’는 역사 속 좌절로 남았다. 그러나 학교는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그들의 자녀들에게 스마트 기기 사용을 일정 연령 동안 금지했듯이 단순히 빠져듦을 넘어 기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아이들을 방어하고자 한다. 스마트 폰에 빼앗긴 대면 관계를 회복하고 흙냄새, 사람 냄새, 책 냄새를 맡게 함으로써 아날로그 감성을 유지해 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취지는 스마트 워치로 혹은 또 다른 무언가로 계속 도전을 받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자식에게도 허락하지 못할 물건을 만들었는지 게이츠와 잡스에게 원망이 크지만, 그들도 그럴 줄 몰랐으리라 이해하며 이게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알파고를 만들고 chatGPT를 만든 인간이 그것의 궁극적 작동 원리는 모른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더더욱 답답하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은 욕망은 자본의 유혹과 뒤섞여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며 막막한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자고 해야 할지 몰라 미안한 마음이 든다. 차라리 나 같은 ‘길치’이자 ‘기계치’도 큰 걱정 없이 살아남았다는 공존의 지혜와 여유를 물려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아마도 바둑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AI를 이긴 인간이라고 기억될 이세돌 9단의 은퇴 인터뷰는 직면한 기계의 세계에 우린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며 도전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경종이 될 것이기에 소개한다(약간의 각색을 가미함).

“근데 지금은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저는 바둑을 예술로 배웠는데 인공지능 측면에서는 일종의 게임이 된 것 같은 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감정이라던가 사람과 사람의 어떤 공명, 이런 건 모르잖아요? 알파고의 바둑은 그냥 게임으로 치고, 인간의 바둑은 따로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맞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빨라도 그가 만든 자동차와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경우는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자동차가 인간에게 달리기를 가르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어두운 대화지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저 달 착륙선에서 내린 인류가 처음으로 한 말처럼 울림이 있었다.

“이번 패배는 저 이세돌의 패배이지 결코 인간의 패배가 아닙니다!”

출처 "facebook:rage against the mac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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