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38. 두 제도의 불안한 동거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3.22 07:15 의견 1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2022 개정 교육과정의 골자는 ‘고교 학점제’이다. 대학에 다닌 분들은 기억한다. 신입생 때 몇몇 선배들이 도와주었던 시간표를 짜는 시간이, 낯설지만 대학이라는 삶의 시작임을 느끼는 특별한 순간이란걸. 세 시간이면 오전 9시 시작해서 12시에 끝나는 3학점짜리 수업, 그리고 점심시간을 넘겨서 오후에 3학점 또는 2학점 등을 배치하면서 일주일 시간표를 짜던 기억들.

교양선택, 전공필수 등을 교선, 전필 등의 약호로 써가며 익혀가던 시절에 다른 학교 친구를 만나면 흔히 묻던 질문은 “졸업 학점은 몇 학점이야?”였다. 마냥 놀기 좋아했던 선배는 목요일까지 시간표를 빡빡하게 짜 놓고 금, 토요일은 아예 학교에 안 간다고 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 모습을 과연 고등학교에서도 볼 수 있을지 기대하며, 부분 시행으로 적응기를 거쳐 어느덧 2025년 전면 시행을 앞둔 ‘고교 학점제’를 알아보자.

이미 수많은 선진국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학점제’로 시행하고 있다는 전 지구적 배경을 전제로 하고, 대표 사이트에서 찾은 고교 학점제를 만든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는 진정한 학생 맞춤형 교육을 실현함으로써 학생의 학습 동기와 흥미를 불러일으킴(그리하여 잠자는 교실을 깨울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필요한 배움이 무엇인지를 찾게 함으로써 진로 개척 역량과 자기 주도적 학습 습관을 길러줌.

선택형 교육과정 운영을 통해 다양한 능력과 적성을 가진 학생 개개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함.

쉽게 말하자면, 지금까지 고등학생들은 주어진 교육과정에 따라 수업을 들어서 원치 않은 배움으로 인해 힘들었다, 그리하여 많은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잠을 잔다, 이제 학생이 원하는 과목을 중심으로 수업을 듣고 공부하면 전보다 훨씬 활기찬 학교생활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그러려면 아무 과목이나 선택하지 말고, 자신을 잘 파악한 후 훗날 기대하는 진로에 맞게 올바른 과목을 선택하여 들어야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의 역량을 키울 수 있다. 여기까지 읽으면 그 좋은 취지에 공감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수고는 구차하다. 좋은 제도이다.

이어서 추가되는 주요 사항은 졸업 여건이다. 그동안은 학생이 출석 일수 2/3를 넘기면 졸업 여건이 주어져서 아무리 공부를 안 해도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는 게 무리가 없었지만, 학점제 이후로는 과목마다 목표한 성취 수준(40%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면 이수가 안 되고(대학에서는 F 학점이지만 고교 학점제에선 incomplete-‘불완전한’의 앞 자를 따서 성취도 I 라 칭함) 이게 누적되어 192학점을 채우지 못하면 졸업이 안 되게 하는 제도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하려는 걸까? 일단 수많은 과목을 개설하는 게 단위 학교에선 도저히 불가능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 간 공동교육과정 등의 장치로 학생들이 원하는 과목이 개설된 다른 학교에서도 학점을 이수할 수 있도록 한다. 여기엔 코로나19 이후에 활성화된 온라인 강좌 등이 활용될 수 있다.

피치 못하게 공강 시간이 발생하면 학생들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을 학교 내에 조성해야 한다. 학령 인구 감소로 학교 공간의 여유가 커지리라는 예상에서 비롯된 방안이다. 끝으로 진로·학업 설계를 지원하여 학생이 과목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 위해 1학년 때 교육과정 설명회와 과목 설명회를 열고, 진로 교사 중심으로 학생의 적성과 흥미를 찾도록 돕는다.

여기까지는 제도를 만들면서 바라는 공식적 사항들을 정리했다. 이제부터는 조금은 냉정한 그늘진 부분을 말하고자 한다. 물론 상당 부분 개인적인 의견임을 전제로 한 점 양해 부탁한다.

앞서 학생들에게 과목 선택의 자율성을 준 것은 ‘네가 원하는 거’를 들었으니까 책임감을 가지라는 의미일 테고, 성취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학생이 없게 해서 원만히 졸업시키는 건 학생 지도를 더욱 열심히 하라고 선생님들을 격려하는 의미일 것이다. 언제나 누리는 게 있으면 책임이 따르지 않던가! 당근과 채찍은 늘 패키지인 것처럼 말이다. 허나, 대체 누리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죄송하지만 확실한 답변은 못 하겠다.

취지는 위대했지만 대학 입시와 결부되었을 때 실패한 이전의 정책들을 답습하는 기시감이 생긴다. 2023년 6월까지만 해도 일반·진로·융합 선택 과목을 절대평가로 하여 내신 경쟁의 부담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입시에서의 변별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에 굴복한 건지 불과 넉 달 후 10월에는 사과탐 융합 선택 과목 9개를 제외하곤 전 과목을 상대 평가하겠다는 180도 바뀐 방안이 나왔다. 교육 정책은 언제나 롤러코스터이고 반전이 있는(그러나 재미는 보장 못 하는) 드라마다. 전 과목에 상대평가로 등급제를 부여하자니 면구스러웠던지 이전 9등급보다 헐거운 5등급 체제를 들고나왔다.

그랬더니 이 변화에 또 유불리를 따지는 특유의 한국적 쏠림이 작동한다. 그동안 상위 4~11% 사이의 약 6% 인원인 2등급 학생들이 이제 상위 10%까지 부여되는 1등급으로 포함될 수 있기에 내신 불리함이 완화되었다는 기대감으로 특목·자사고 등의 고등학교에 몰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편에선 A·B·C 절대 평가였던 진로 선택 과목 역시 상대 평가가 되면서 상대적으로 등급 신경 쓸 과목이 많아진 상황에 오히려 일반고가 내신 관리에 유리하다는 주장도 있다. 대입에 유리한 고등학교에 관한 고민으로 이미 고교 학점제의 건강한 관리나 적용에 관한 생각들은 내쳐져 있다.

2028 대입에서의 수능 실시 계획 역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어정쩡한 미숙아로 나왔다. 고교 학점제에 부합하는 수능으로는 많은 전문가들이 공감한 대로 절대 평가 및 자격시험 등의 모습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놈의 변별력을 갖추기 위해 현행 9등급 체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학점제 아래에서 내신 과목 선택에 영향을 줄까 봐 1학년 통합사회·통합과학을 포함해 문·이과 공통으로 국어, 수학, 영어를 보게 하였다. 적어도 수능에서는 선택 과목이 없으므로 내신에서 편안히 과목 선택을 하라는 취지이다.

내신의 과목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취지는 이해한다만 수능과 학교 내신이 완전히 따로 가게 되는 파국은 뒤 이어 살짝 보고된 서울 소재 주요 대학 정시 비율 40% 유지로 인해 폭발한다. 내신 등급의 완화는 1등급 이외의 학생들에게 그 전보다 가혹한 좌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래의 상위 16% 정도 학생들은 3등급 중반 정도의 위치를 유지해서 학종으로 쓸만한 수도권 내 학교들이 있었지만 5등급 체제 아래에선 이들이 2등급(상위 11~34% 이내)을 받아 기존의 4등급 중반 학생들과 같은 그룹으로 취급받기 때문에 엄청 불리한 상황이 된다. 그러면 선택은 하나다. 1학년 때 2등급 과목이 몇 개 생기면 바로 40% 비중 대학의 정시 모집으로 전환해 버리는 길이다. 아예 자퇴하는 학생이 많아질 수 있다는 불안한 전망도 그래서 나온다.

언제나 입시를 선도하는 서울대는 지난 2월 6일, 2028 대입에서 수시·정시 모두 수능 비중을 대폭 축소하고 최저학력기준 등을 없앨 계획이라 말했다. 정시에서는 1단계에서 등급 점수만 활용하여 모집 인원의 2~3배수를 선발하고, 2단계에서는 1단계 수능 점수 60점에 학생부 등 평가를 40점으로 합산해 100점 만점으로 점수를 내겠다고 한다. 수능에서 심화 수학이 배제되었기에 최상위권 변별력이 약해지리라는 우려를 보완하겠다는 의도와 함께 어찌 보면 고교 학점제의 취지에 맞추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학교가 서울대처럼 할 순 없을 것이다. 이래저래 대학 입시는 다시 복잡계로의 문을 연 상황이다.

학교 현장에서 담임 교사가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 수업에서 반 아이들을 모두 가르치지 못하는 일에 이미 익숙하다. 다양한 선택 과목으로 빈번한 이동은 필수다. 학급에서 정주하며 급우들과 우정을 쌓고 하나된 끈끈함을 이루는 일은 요원해질 것이다. 게다가 학생마다 다른 수업 시간표로 어리둥절한 아이들과 학교 내 혼선이 많아질 것이다. 선생님들은 수업 교환이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고, 최소 세 과목 이상의 교과목을 수업하면서 업무 강도는 커질 것이다. 과목 선택의 자율성이 커지겠지만 선택 인원이 많아 내신 얻기 유리한 과목으로의 쏠림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녕 자신의 원하는 진로에 맞춰 가슴 설레며 듣고 싶은 과목을 듣는 행복한 학생은 몇이나 될지 파악하는 작업이 제도의 본격 시행 해인 내년부터 적극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안감을 떨쳐내긴 어렵다.

귤화위지(橘化爲枳)라 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어떤 환경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많은 나라에서 잘만 시행하고 있다는 학점제가 제아무리 좋은 취지로 시작되어도 우리 교육의 극강 빌런인 대학 입시 아래에서는 다 탱자가 되어버리는 상황은 이젠 안타깝기까지 하다. 경쟁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을 외면한 채 주변만을 바꾸는 비겁한 시도를 하는 와중에 결국 묵묵히 일하는 선생님과 교육 공무원들의 수고로움만 하염없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 학부모들의 걱정과 불안도 빼놓을 수 없다.

어릴 때 보았던 만화 영화 ‘형사 가제트’가 떠오른다. 주인공인 인조 인간 가제트는 좌충우돌하며 사건을 해결하여 악당인 ‘매드 당’의 원한을 뒤로하고 매 에피소드가 끝나지만 시청한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다. 실제로 사건을 해결한 건 그의 조카 ‘페니’와 강아지 ‘브레인’의 감춰진 활약이라는 걸. 집단 지성이어도 좋고 저 헤겔이 말한 ‘이성의 간지’여도 좋다. 우리나라에서 누군가는 형사 가제트처럼 좋다는 교육 정책을 미련스러울 정도로 제안하지만, 페니와 브레인처럼 실제로 교육 현장을 꾸려나가는 역할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라며 전 국민이 바라는 좋은 교육 제도가 꼭 실현되는 그날을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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