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의 철학, 노자도덕경 산책(47)

태도 혹은 자세에 대하여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3.21 07:00 의견 0

김준식(진주고등학교 교사)

어제 가지 못한 산을 오늘 갔다. 산은 늘 거기 그대로 있지만 산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언제나 변화한다. 지난주에 ‘얼레지’ 잎이 나와서 이번 주에는 꽃이 폈겠거니 했는데 여전히 잎만 있을 뿐, 꽃은 아직이었다. 가끔 꽃대가 올라온 것은 있었지만 아직은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다.

자연에는 사실 태도가 없다. 그 자연을 향한 우리의 태도만 있을 뿐이다. 자연은 인간 기준으로 결코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아니 자연은 인간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꽃을 보겠다는 마음은 꽃을 찾는 태도를 가지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과 전혀 무관하거나 혹은 무관해야만 한다. 인간의 의도나 의지가 자연에 개입되는 순간, 더 이상 자연은 자연이 아니다.

도덕경 56장에는 자연을 향한 인간의 태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새기태, 폐기문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시위현동) 구멍을 막고 문을 닫으며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며 빛을 완화시키고 먼지와 하나가 된다. 이것을 ‘현동玄同’이라 한다."

물론 이 말을 자연에 대한 태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도덕경 전체가 그렇듯이 정치 지도자를 향한 노자의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를 '우리'로 하고 그 대상을 '자연'으로 돌려도 별 무리 없이 해석된다.

구멍을 막는다는 것은 감각기관을 막는다는 의미다. 문 역시 비슷하거나 같다. 감각기관을 막는 것은 그 감각기관이 가진 욕망을 제어한다는 의미다. 욕망을 제어한다고 해서 지극히 기본적인 욕망까지 제어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도덕경 3장 “실기복實其腹”처럼 배가 고플 때는 먹어야 한다. 그런 기초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닌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즉 눈으로 보고 싶은 화려함, 귀로 듣고 싶은 미묘한 음악, 입으로 느끼려는 오묘한 맛에 대한 제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날카로움이나 얽힌 것, 그리고 강렬한 빛은 매우 치우쳐 있음을 뜻한다. 치우침은 극단으로 가기 쉽고 마침내 중심과 균형을 잃어버리고 만다. 중심이나 균형은 삶의 태도이어야 하는데 나를 비롯한 우리들은 언제나 위태로운 치우침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날카로움은 무디어져야 하고 얽힌 것은 풀어져야 하며 강렬한 빛은 부드러워져야 한다.

마침내 작은 먼지처럼 세상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먼지를 인용한 것은 개인적으로 조금 무리한 인용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노자 시대, 혹은 그 이후 도덕경이 완성되던 그 시절에 먼지라는 것은 곧 세상의 일부를 이야기함이라고 추정해 본다. 『장자』 ‘지락’에 등장하는 ‘지리숙’과 ‘골개숙’의 이야기에서 ‘골개숙’의 말속에 있는 먼지를 통해 도덕경의 먼지가 가진 의미를 희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이란 본시 빌린 것이다. 빌려서 살고 있으니 생명이란 먼지나 때와 같은 것이다. 사생死生은 주야晝夜의 교대交代와 같은 것이다.” 즉 먼지라는 것은 세상의 일부라는 의미일 뿐, 그 이상이나 이하의 의미는 아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동’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억지와 욕망이 사라진 평온한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현동’과 자연은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동’의 단계는 자연과 일치하려는 생각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자연이나 도는 사실 인간의 기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많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은 자연이나 도는 인간 기준으로 해석할 수 없고 더불어 적용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비슷해지거나 가까이 다가갈 뿐이다. 그 단계가 ‘현동’인 셈이다.

작년에 핀 얼레지를 촬영한 앨범을 보며 오늘 산에서 얼레지를 꽃을 보고 싶어 했던 나의 태도와 자세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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