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37. 21세기 가정환경 조사서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3.15 07:01 | 최종 수정 2024.03.15 07:03 의견 1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언어가 행동을 규정하고, 제한하고, 이끌기도 한다는 데 동의한다. 많은 제자를 겪으면서 다양한 사정으로 엄마하고만, 또는 아빠하고만 사는 아이들을 대한 경험이 있다. 이런 경우에 한때 가족 현황에 ‘편부, 편모’라는 말을 썼다. 한쪽으로 치우쳤다(偏)는 의미가 있어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퇴출당해야 마땅한 말이다. 그 단어를 포함해 ‘결손가정’이란 말도 같은 이유로 무리한 언어다. ‘완전한 가정’이 있다는 전제를 함의한 고정된 사고의 표현이고 단어 자체가 편견을 담고 있어 부당하다. 게다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부)가 있을 수 있고, 부모님이 아닌, 형(오빠)이나 언니(누나)가 돌보는 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요즘은 ‘보호자’라는 말로 묻고 기록한다. 가족의 유형이 다양해져서 학생 지도에 참고하기 위한 하나의 사항일 뿐이고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건 무례하다는 공감대도 이미 자리를 잡았다.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사려 깊은 말들이 많아진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분명 발전하고 있다.

학창 시절부터 교사 초임 때까지 겪었던 일이지만 과밀 학급으로 학생 수가 너무 많을 때는 손을 들어서 가정환경을 집계하기도 했다. 간단히 집계할 수 있는 종교나 통학 거리 등을 물었던 것 같다. 어릴 때 사려 깊지 않았던 어떤 선생님은 아이들의 집이 자가인지, 전월세인지 여부도 손을 들게 했던 기억이 난다. 과격하고 폭력적인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종교나 통학 거리 역시 공개적으로 물어볼 수 없는 민감한 사항이다.

친한 선생님 중 한 분은 일반적인 종교 신자를 파악한 후 장난으로 마니교, 조로아스터교까지 질문하곤 멈췄어야 했는데 여호와의 증인을 물었다가 한 여학생이 손을 들어 전교에 알려지는 난처한 상황도 있었다. 선생님은 공개적으로 사과했지만, 오히려 아이는 곤란한 내색을 하지 않고 당당해서 그 상황을 넘어갈 수 있었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에피소드다. 과거를 떠올리며 나 또한 귀찮다고 대충해서 실수한 일이 없었는지 돌이켜보고 반성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이불킥’할 기억들만 많아지고 있는 건 슬픈 일이다.

아이들을 지도하고 상담하면서 가정 상황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요즘엔 흔치 않은 경우지만 조부모를 모시고 사는 아이도 있고, 다자녀라 형제가 많은 아이도 있다. 부모님이 별거 중인데 양쪽을 두루 만나면서 지내는 아이도 있다. 예전에 비하면 가족 유형이 정말 다양해진 모습들이다. 웬만하면 경제적 상황은 알려고 하지 않지만, 은연중에 집안 형편을 알게 되는 순간도 있다.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엄마가 돈이 없다고 하지 말래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의 진위 여부나 가정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해도 마음이 찡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정상성(normality)’에 관한 동경이 심하다. 유달리 ‘평균’에 대한 집착이 크고 남이 하는 만큼은 하고 살아야 한다는 의지도 강하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 약간의 일탈이나 다름이 큰 불안을 만들고, 소외받고 뒤처진다는 느낌은 곧 공포와 두려움으로 연결된다. 서울이나 수도권 밖에서의 삶이 좌절로 여겨지고, 연봉 얼마 이상을 벌지 못하면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때때로 입고, 먹고, 여행 가야 할 것들을 못 하면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서로를 옥죄고 있는 사회 분위기,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아이들 역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정상성’으로 판단될 범주가 협소할 때 그 밖의 영역에는 수많은 편견이 출현할 수 있다는 점을 긴장해야 한다. 아이들을 대하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사항이다. 일 례로 성적이 평균 이하의 학생이라고 모든 것이 평균 이하일 것이라 속단하면 안 될 일이다. 아이가 이미 그렇게 느끼고 고통스러워할 수 있는데 거기에 선생이 더한 부담을 주면 될 일인가. 주변 아파트 단지에 살지 않는다고 형편이 어렵거나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하면 안 된다. 다양한 가족 상황의 경우도 특징을 두루 살피고 아이의 마음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읽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엄마가 돈이 없다고 하지 말라고 하는 데는 다자녀 가정이라 그럴 수 있고, 아이에게 경제적 궁핍을 체험시키려는 교육적 의도일 수 있다. 사려 깊은 관심이 커질수록 상담도 발전하리라 믿는다.

이런 생각에는 개인적인 소회도 영향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돌이켜 보면 친절하고 좋은 담임 선생님이었는데, 당시 선생님은 발표하기 수업 과제로 ‘우리 아빠의 직업과 우리 집 살림’이라는 주제를 정하셨다. 그때 우리 집은 마침 부모님이 하시던 가게를 접고 잠시 수입이 없었던 시기였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실직한 상황을 감추고 싶은 날들이었다. 빠듯한 살림에 아껴 쓰고 절약해야 했던 건 굳이 부모님이 말씀하지 않아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진행된 수업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편하게 아빠의 직업을 말하고 가족 경제를 어떻게 꾸려가는지 발표한 후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의 차례에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택한 게 ‘왜 이런 주제로 발표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선언과 반항이었다. 선생님은 어이가 없었는지 나에게 구석으로 가서 무릎 꿇고 있으라는 벌을 주셨다. 한참을 그러고 앉아있는데 눈물이 흘렀다. 서러운 경험이 훗날 제자들을 위한 배려에 도움이 된다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어린 나에게 위로하고 싶다.

2023년 합계출산율이 0.72로 사상 최저를 찍었다.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학교에 있는 입장에서는 사교육 비용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동네 상가에서 문득 수학 학원에 붙은 교습비를 확인했다. 고등 이과 수학의 경우 1,764분에 43만 원, 시간당 하면 약 30시간에 해당하고, 어림잡아 한 달 동안 일주일에 세 번, 하루 두 시간 남짓한 수업인 걸 알 수 있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최소한 영어, 수학 두 과목은 듣는다고 가정할 때 아이 한 명당 90만 원 정도의 비용을 예상할 수 있다. 이게 두 과목을 듣는 경우이다. 교습비에는 420분에 43만 원짜리 수업도 있었다. 일명 ‘고등 선택’인데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나로서는 무언가 특별한 수업이라는 예상만을 남겨둘 뿐이다. 아이 둘을 키우면 최소의 학원비가 200만 원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교육비를 쓰는 가정이 허다하다. 그러니 사교육비야말로 미래 세대의 희망에 반하는 ‘망국병’ 얘길 듣는 것이다.

2028학년 대입 방안에 9등급 내신이 5등급으로 완화되었고, 학종과 정시의 영향력이 살아남아서 그동안 내신 불이익의 불만이 컸던 학교들은 한숨 돌렸다는 진단이 대세이다. 바뀐 대입 방안에 적용받지 않는 마지막 학년인 작년 중3 아이들의 고입 현황도 이런 영향을 받아 실제 2024학년 전국 자사고 경쟁률이 6년 이래 최고를 보였다. 우리 학교 주변의 자율형 공립고나 특목고 등의 경쟁률과 점수도 상승해서 이 같은 현상이 일반적이라는 확신을 준다. 문제는 비용이다.

자사고의 경우 2022년 기준 평균 1년 학부모 분담금이 약 864만 원으로 일반고보다 18.5배나 많게 나타났다(교육부&KEDI 연구). 심지어 전국단위 모집 자사고만 따지면 평균 부담금은 무려 약 1,200만 원으로 일반고의 26배이다. 베리타스 알파 기사에 따르면 2022학년 결산 기준 전국 28개의 외고 평균 1인당 교육비는 1,334만 원이었다. 많은 자사고와 외고가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기에 그 비용이 포함된다면 실제 큰 학비는 아니라는 의견이 있지만 어쨌든 그 학교에 다니는 이상 지출해야 할 비용으로 따지면 적지 않은 목돈인 건 사실이다. 빠듯한 가정에서 아이가 자사고나 특목고를 가겠다고 하면 부모의 걱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그림이 그려진다. 아이들을 대하며 처한 환경을 투명하게만 볼 수 없는 상황들이 너무도 많다.

정상성에만 있었던 사람은, 그리하여 한 번도 약자의 삶을 살아보거나 궁핍의 기억을 갖지 못한 사람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이해하는데 어려울 수 있다. 경험보다 좋은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 또한 나보다 더 어려웠던 환경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함부로 단정하진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처한 가정의 어떤 환경이 그들에게 큰 상처가 되지 않을 날들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기약 없는 바람을 한다. 집안 얘기를 불편해하며 눈치 보는 아이 앞에서 언제쯤 나의 복잡한 연민이 그들을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을지, 고민은 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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