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娛樂歌樂 시 읽기】11. 이은택, ‘지그린다는 것’, <너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삶창>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2.10 07:15 | 최종 수정 2024.02.10 19:10 의견 0

동네 친구들과 늦도록 쏘다니다

슬며시 대문 열고 들어서면

안방 깊은 곳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목소리

얘야, 동생 안 들어왔다

잠그지 말고 지그려 놓아라

어머니의 그 목소리를

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듣는다

반 아이들에게

어제 느낀 서운함을 오늘도 느낄 때

친구가 술기운에 못 이겨

되지도 않는 말로 몰아세웠을 때

불현듯 아내가 먼 사람처럼 느껴지고

세상이 지겹도록 미워졌을 때

그럴 때마다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

얘야, 잠그지 말고 지그려 놓아라

내가 그럭저럭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어머니의 목소리를

우리 집 아이들한테 똑같이 전해주고 싶다

얘들아, 잠그지 말고 지그려 놓아라

그나저나 그때의 젊은 어머니는

내가 들어오는 줄을 어떻게 아셨을까

충청도 출신의 저명한 시인으로 나태주와 이정록이 있다. 나태주가 자본주의 시장을 꿰뚫는 서정주의 시인이라면, 이정록은 충청도 말로 촌철살인의 언어를 조련하는 시인이다. 반면 시인 이은택은 길 가다 이런 시인 아느냐 물으면 아. 저 그분 알아요, 하고 안다고 답할 사람 하나 없는 유명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어디 나가서 스스로 선전하거나 꾸미거나 포장할 줄도 모르는 그냥 충청도 촌사람이다. 한마디로 의뭉스럽다. 의뭉스럽지만 믿음직스럽고, 그이 시를 읽다 보면 입꼬리에 얼핏 웃음을 짓게 한다. 말처럼 시도 길고 느리지만 읽다 보면 핵심이 잡힌다. 특별한 메타포어도 없고 추상적이지도 않다. 그가 탐구하는 것이 거대담론이 아니라 장삼이사의 미시적 일상이다. 그래서 세상 심각한 일도 없고, 그렇다고 심각하지 않은 일도 없다. 한글도 모르는 ‘익환이’가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한글을 가르쳐 보려고 노력하던 '선생'들이 등장한다.

이 시집의 맨 앞에 나오는 ‘지그린다는 것’이라는 시가 이은택 시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지그린다’는 말은 대문을 꼭 걸어 잠그지 않고 뒤에 들어오는 사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살짝 닫아놓는다’, ‘닫아놓는 시늉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행동을 하되 단정적이지 않고 여유를 남긴다.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되 누구에게나 박절하게 대하지 않는다. 충청도 사람의 행동과 정서를 대변하는 대표적이 말이다.

시에서 이 말은 예전의 어머님 말씀이다. 잊어버릴 듯도 한 말이 시적 화자(시인)가 나이 들어 생각하니 진리다. 그래서 나이 들어 아들에게 물려주는 유산이 되었다. 모든 것이 야박하고 철저하고 계산적인 사회에서 ‘지그린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인 동시에 ‘어머니’를 생각하는 시요, 어머니의 말씀이 나를 통해 아들(후대)에게 전해야 하는 무언가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젊었을 때 고민이 없어 고민이라던 시인은 지금도 크게 고민을 하고 사는 것 같지 않지만, 심각하지 않은 일 속에서, 아니 ‘제자리암’ 같은 시에서 보면 아내의 암과 같은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암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제자리에 맴돌고 있는 것을 고맙고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특유의 낙관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서 그 상황의 핵심을 파악해 보려 주는 것이 이은택 시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특별할 것도 없고, 오히려 의뭉스러우면서도 사태의 핵심을 꼭집어 주는 충청도적인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시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란 무엇인가? 머리를 써서 따라 읽어가도 끝에 가면 무슨 말인지 모르고 뒤돌아서거나,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이 시인가? 따라 읽다 풋! 하고 책장을 덮어 버리는 게 시인가? 개인의 일상적 서사敍事를 따라가다 보면 마음속으로 훅 뛰어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시가 바로 좋은 시가 아닌가? 멀리 가지 말자. 우리가 사는 일상, 매일 살고 매일 잊고 매일 살고 죽고 하는 하찮은 일상 속에서 삶의 진수가 있다. 분석과 설명이 필요없는 시가 좋은 시다.(전종호, 시인, 시산문집 히말라야 팡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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