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호의 임진강 노래 15】회의(懷疑)하는 회의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2.07 07:06 의견 0

우여곡절 끝에 별난 사람들의 모임에 들어오게 되었다. 독일에서 돌아와 마을에 합류하기로 했던 사람이 독일인 남편의 사정이 변경되어 귀국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자리 하나가 비게 된 것이다. 나나 마을에 몇 가지 일들이 더 있었지만 그냥 간단히 우여곡절이라고 부르자. 우리는 이리저리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의 과정을 우여곡절이라는 한 단어에 욱여싸 넣지 않던가.

회원이 되고 처음 회의에 갔을 때 회의는 그동안 내가 학교라는 관료제 조직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이미 마을 마스터 플래너가 결정되었고 마스터플랜 계약이 체결된 상태였다. 그동안 이 마스터 플래너와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회의를 진행하면서 의견을 조율해 왔고, 합의에 의해서 필지가 분할되고, 필지 안에 각자의 집이 앉을자리, 모양과 방향 등이 결정되었음에도 마을 마스터 플래너가 각자 회원에게 제공해야 할 집 도면(프로토타입)을 둘러싸고 혼란 가운데 한참이나 설왕설래가 진행되었다.

처음으로 회의에 참가하는 것이라 이전 회의의 내용과 분위기를 모르는 입장에서 회의는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한마디로 체계적이지 않았고, 효율적이지 않았다. 프로토타입이 집 구조의 대강적 구도(構圖)인지 집을 당장 지어도 괜찮은 시방서(示方書)인지에 대한 개념의 이해 차이였다. 회원들은 마스터플랜의 비용 안에 각자의 완전한 설계도가 포함된 것으로 이해했고, 마스터 플래너는 각자의 집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도가 아니라 집 구조에 대한 대강의 그림이라고 설명하면서 목소리가 커지고 감정이 고조되기도 했다. 그동안 몇 달 동안 회의를 했으면 기본적인 개념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합의를 하면서 왔을 텐데 아주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서 갑론을박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 이후 몇 차례 회의를 하면서도 이런 혼란은 계속되었다. 지난번 회의에서 결정된 것들이 이유 없이 재논의 되기도 했다. 회의의 결정 사항이 아침이 되면 번복이 되고 또 다른 논의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회의의 비효율성을 절감했지만, 좀 더 나은 결정을 위해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고, 이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별다른 반대나 반발도 없었다. 효율성 대신 만족감 또는 효과성이 더 중요하다는 태도였다. 마을의 대표가 있어도 회의를 진행할 뿐 조정이나 설득 같은 과정이 없었다. 원로급 인사가 계셨지만 일절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회의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수평적이었고 논의 결과는 얼마든지 가역적(可逆的)이었다. 회의는 늘어지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낼 수 없었고 다음 주로 회의가 연장되기도 했다. 공동체를 지향하는 모임이라서 그런지 위계도 체계도 없는 것 같았다. 무성한 말들의 잔치였다.

코로나 때문에 자주 모일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자주 또는 아예 회의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도 회의의 진행과 결론 도출을 어렵게 어렵게 하는 요소였다. 그러다 보니 같은 주제가 다시 논의되고, 결과적으로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집 짓는 마을공동체에 참가한다고 하니 아는 사람 중에는 말리는 사람도 꽤 많았다. 반드시 깨진다고 차라리 혼자 집을 지으라고 충고한다. 같은 교주와 교리를 따르는 종교공동체도 분열하는 게 다반사인데 그렇게 느슨한 조직이 잘 될 수 있겠냐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었다. 나도 책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의기투합하고 귀촌했던 사람들이 몇 년 만에 뿔뿔이 헤어지는 것을 많이 보았다.

함께 집을 짓는 사람들의 첫 번째 위기는 필지 분할할 때 온다고 한다. 한 필지의 땅을 작게 나누다 보면 거기에서도 위치와 방향 등에서 좋고 나쁜 땅이 나오게 되기 마련이고 좀 더 좋은 땅을 차지하려고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분란이 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행히 장로급 인사가 남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산 아래 그늘진 땅을 먼저 선택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집 지을 시기를 고려하여 하나씩 선택하다 보니 땅 배정을 두고는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고 한다. 첫 번째 위기를 통과한 것이다.

회의에 참가할 때마다 일이 잘되어 마을을 만들 수 있을지, 마을이 만들어져도 다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과 회의(懷疑)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공동체를 산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전환하는 것이다. 효율성을 내세우는 현대적 삶을 버리고 느리게 가더라도 하나씩 하나씩 모두가 만족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혼자서 열 걸음’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열 명이 한 걸음씩’ 걸음을 떼는 것이다.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혼자서 전원주택 한 채를 지을 수 있는 부지에 16 가구가 14개의 작은 집을 짓는 우리 마을의 경우에는 특히 그러해야 한다.

호흡을 맞춰 가기 위해서는 느려서 답답한 사람도 있고, 그것마저 걸음이 빨라 호흡을 가다듬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 효율이 아니라 효과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함께 산다고 해서 공동체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것은 다르게 존중하면서 같은 뜻으로 한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때 공동체가 되어 간다. ‘둥글게 둥글게’나, ‘하나로 하나로’,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이 ‘따로 또 함께’ 가는 것이 공동체다. 인간이 자연생태계에서 배워야 하는 것들이고, 내가 이 모임에서 체득해야 할 덕목이다. 예상치 못했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무릎을 꿇고 낮은 자세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 여기 있어요

불리는 이름쯤이야 아무렴 어떠랴

숭고한 존엄으로 빛나는 작은 꽃들이 있다

세상의 길은 모두 앞으로 나고

점점 더 직선으로 넓어져 가지만

돌아서야 비로소 뒤꿈치를

보이는 길이 있다

보이지 않지만 굽고 작은 길이 있어

고샅길이 세상의 길로 이어지듯

봄날 어린 꽃들이 여기 한 무리

저기 또 한 무리 함께 모여

우리 노래해요 아찔한 향기

마침내 세상은 온통 꽃 천지가 되고

우리 서로 힘이지요

여리디 여린 목소리도 광장에서

어깨를 걸면

간절한 울음으로

낡은 것들 쓸어버리는 물살이 된다

- 졸시, ‘따로 또 함께’, 시집 <가벼운 풀씨가 되어도 좋겠습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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