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한 부조한다고, 날씨도 우리의 산티아고 순례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스페인 갈리시아의 날씨는 하루에도 비가 오고 흐리고 맑다가 다시 비가 오는 등 변덕스럽기로 유명하다. 일주일 내내 비 소식에 아침부터 판초Poncho 우의(망토 같은 우비)와 비 치마, 스패츠Spats(신발 위에 신는 각반)등을 배낭에 챙기고 떠났다. 오랜만에 그 신기한 비 장비들을 드디어 사용할 수 있나보다고 이제나저제나 비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후에는 비 예보가 있어도 거추장스런 장비들을 배낭에 잘 챙기지 않게 되었다.
대부분은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빨래를 널고 한 두 시간 후에 여지없이 비가 내렸다. 그때쯤이면 스페인의 따가운 햇볕에 옷도 거의 말라 비가 온다는 전달을 받자마자 우리는 튀어 나가 정신없이 빨래줄에 널린 옷가지들을 걷어와 피난민처럼 침대 주위 여기저기에 걸쳐 놓았다. 하루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쏟아지는 시원한 비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우리는 일기예보조차 맞지 않는 운 좋은 날씨를 참으로 고맙게 여겼다.
판초니 스패츠니 하는 특이한 비 장비들을 제대로 사용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순례 마지막 날이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거행되는 낮 12시 향로 미사(부타푸메이로Botafumeiro는 ‘향로’를 뜻하며, 향로미사는 순례자들의 땀 냄새로 향을 피운 것으로 유래되었다는데, 대성당의 메인 돔 약 20m 높이에 매달려 있는 무게 53kg, 길이 150cm되는 대형 향로를 도르래에 연결된 줄을 잡고 붉은 옷을 입은 사제들과 수사들 8명이 앉았다 일어섰다는 반복하면서 성당의 측면으로 좌우로 크게 흔들리게 하여 향을 피우는 장관을 연출함)에 참석하기 위해 우리는 새벽 5시부터 출발을 서둘렀다. 밤부터 내린 비가 깜깜한 새벽까지도 세차게 이어지고 있었다. 해드렌턴을 켜고 가는 용감무쌍한 부산 자매를 따라 넷이서 꼭 붙어 나무 우거진 컴컴한 좁은 숲길을 판초와 비 치마, 스패츠를 완벽히 착용하고 질척거리는 물웅덩이가 깊이 패인 길을 더듬거리며 껑충껑충 뛰어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마 그때가 비 장비들이 비로소 가장 제빛을 발휘했던 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순례 15일차 가장 짧았던 베가 데 발까르쎄Vega de Velcarce에서 라라구나La Laguna까지 10km의 구간을, 보통 20km, 30km이상 걸었던 우리로서는 껌이라며 우습게 여겼다. 그런데 그날 하루는 한여름처럼 찌는 듯한 날씨었다. 기회있을 때마다 그늘을 찾았고 헉헉거리고 쉼 없이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물을 마셔댔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날씨 덕을 톡톡히 보고 다녔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이토록 더운 날씨에 20km 이상을 걸었다면 어찌되었을지 생각만해도 아득해졌다. 이런 날씨의 부조가 누구의 덕이냐고 서로 농담하며 팀의 우의友誼를 다졌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