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호 교수의 노자 이야기, 노자사상과 초기 도교의 민중성(3)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3.11.29 07:33 의견 0

2. 노자, 사(士) 계급 비판과 도에 대한 재정의(2)

그러나 노장은 당시에 사용되는 도 개념을 넘어서, 사물의 존재 근거와 변화의 원리를 도에서 찾았다. 노장이 제시한 도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당시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신앙하던 천과 상제에 대한 의심과 부정으로 도를 제시하면서 새로운 철학을 연 것이다. 노장은 천의 존재를 도의 하위에 두면서, 천이 의지를 가지지도 인격도 가지지도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더 나아가 도는 무위자연(無爲自然)한 속성을 가진 것으로 어떤 목적이나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상제, 천 신앙에 기초한 국가 사회적 규범들을 전면적으로 뒤엎는 시도이다.

둘째는 백성들을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다스려 진다는 정치사상을 펼친 것이다. 다시 말해 무위정치를 주장한 것이다. 무위정치란 위정자가 인위적인 영향력을 가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맡겨 둔다는 뜻이지만, 그래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무위자연한 도의 속성에 따라 정치를 하면, 백성들이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만족하면서 각자의 자유로운 본성을 이루게 된다는 의미이다.

우선 살펴볼 것은 도를 통한 기존의 사상 뒤엎기이다. “천지가 생기기 전부터 그 무언가가 혼돈 상태로 있었다. 그것은 고요하고 텅빈 상태를 변함없이 유지하였다. 그것은 계속 운동하여 그침이 없다. 우리는 그것을 천하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이름을 알 수 없어 그냥 도라고 부르기로 한다.”『장자』에서도 비슷한 사유가 보인다. “(도는) 천지가 있기 이전인 그 옛날부터 본래 있었다. 귀신과 상제를 신령스럽게 하며 하늘과 땅을 나았다. 태극보다 앞에 놓여 있어도 높지 않고 육극보다 아래 놓여 있어도 깊지 않다. 천지에 앞서서 생겨났어도 오래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상고보다 오래 살았지만 늙었다고 할 수 없다.”

도를 천지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존재이자, 이 세상의 존재 근거인 어머니라고 규정한 말은 당시의 천 신앙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부정은 천이 인격과 의지를 가졌다는 당시의 관념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이어져,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제사 때 쓰고 버리는 풀강아지로 본다”거나, “만물은 각기 다른 이치를 가지고 있지만 도는 그 중 어느 하나를 편애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물론 도는 상제 보다 앞선 존재이다.

상제나 천은 의지를 가진 반면에 도는 의지나 목적을 가지고 만물을 생성하거나 전개하는 것이 아니다. “도는 만물을 생성하고도 소유하지 않고 만물을 이루어 주되 자랑하지 않으며, 자라게 하고도 주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늘은 낳으려 하지 않아도 만물은 스스로 생겨나며, 땅은 키우려 하지 않아도 만물은 스스로 자란다.” 만물은 원래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만물의 입장에서 “도가 귀한 이유는 남이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스스로 그러하게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도는 만물에 간섭하거나 명령하는 존재가 아니라, 만물이 스스로 생장하고 발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 도의 작동 방식은 “항상 작위를 하지 않으면서도 이루지 않는 것이 없다.”

도의 작동방식이 무위자연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현실 정치에 적용하면 ‘무위정치’가 된다. 그런데도 당시의 정치는 인위적으로 진행되었다. 노자가 목격한 춘추 말기란 인위적으로 법령을 집행하고, 백성들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으킨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을 노자는 “천하를 취하여 그것을 인위로 다스리려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본다. 천하란 신묘한 그릇이어서 인위로 다스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인위로 다스리려는 자는 그것을 망치고, 거기에 집착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만약 도의 작동 방식인 무위자연을 따른 정치를 펼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백성들이 스스로 조화와 균형을 이룬 사회를 건설하지 않을까. 노자는 그렇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스스로 그러한 힘인 덕을 가지고 있기에 “백성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고루 다스려지게 된다.” 이러한 도의 속성과 백성들의 덕을 이해한 군왕이라면, 어떨까. 아마도 그는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저절로 그러함과 스스로 그러함을 가장 잘 드러내게 하는 사람일 것이다. “군왕이 이러한 도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스스로 생성화육할 것이다.” 간섭하지 않고 명령하지 않으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공이 나타게 되는데, 백성들은 모두 다 자기가 스스로 그러했다[自然]고 말하게 된다.”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 그러함과 저절로 그러함은 군왕이 정치적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는데서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무위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저절로 교화되고,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저절로 올바르게 되고, 내가 아무 일도 안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욕심이 없기 때문에 백성들은 저절로 소박해진다.” 만약 위정자들의 정치적 간섭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다면, 자연의 치유능력은 백성들이 받은 인위적인 질곡을 치유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대저 본성을 따라 곧바로 가는 것은 자연의 속성이다. … 본성이 손상되었지만 고칠 수 있는 것도 자연의 속성이다. 자신의 자연적 속성이 마땅히 묵형을 지우고 코를 붙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노장의 도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자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 노자가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道法自然]”고 할 때, 스스로 그러함이 도의 속성인 것이다. 여기서 ‘자연’은 대상 세계로서의 자연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함, 저절로 그러함이라는 의미이다. 저절로 그러함과 스스로 그러함이라고 자연을 이해하면, 자연은 변화와 행위의 원인을 자신이 갖는, 다시 말해 ‘자기이연(自己而然)’과 ‘자기이유(自己而由)’로 해석된다. 이 두 가지 언설은 ‘자기로부터 그러한’, ‘자기로부터 말미암는’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은 철학적으로 자유(freedom)의 의미와 동일하다. 자유는 그 동인이 타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개개의 존재자가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존재하며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개개의 존재자가 자신에 내재하는 어떤 힘과 능력에 따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게 마련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노장의 도를 읽어내면, 노장의 도는 다른 존재에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주체적 존재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는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저절로 다스려진 이상사회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노장의 도가 가진 자연이라는 속성은 모든 존재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이자, 자율성을 인정하는 자유의 철학이자 자유의 정치철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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