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호의 임진강 노래 6】원점회귀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3.11.22 07:45 | 최종 수정 2023.11.22 18:45 의견 1

사실 퇴직한 다음날 9월 1일부터 대략 열흘 동안 파주에서부터 고성까지 평화누리길을 따라 혼자 걸으려고 했다. 히말라야 구름길을 두 번이나 걸었지만, 제가 사는 분단의 강산을 걸어보지 못한 자를 제대로 된 트레커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바라보기만 하는 임진강이나 한탄강이 아니라 강을 가슴에 끌어안고, 달리지 못한 철로를 일으켜 세워 함께 금강산까지 달리는 길을 걸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가면서 옛 시인묵객들이 머물거나 묵었던 자리에서 서서 당시의 경치와 정취와 시흥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분단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서 <임진강> 시편들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런데 2학기에 가까이 있는 대학에서 직업기초과목으로 <글쓰기와 의사소통> 강의를 맡게 되면서 통으로 휴전선을 걸으려는 계획은 날 될 때마다 조금씩 나누어서 걷는 방식의 계획으로 바뀌게 되고, 휴전선 걷기는 지금 제주에 와서 산당(山堂)을 찾아다니는 걸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난데없는 전화를 받고 예상치 않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 지원서를 쓰게 된 것이다. 지원 자격은 4급 공무원 이상에 준하는 경력 소유자라고 했다. 교원은 따로 급수가 없으나 고등학교 행정실장이 5급이니 중등학교 교장이나 대학 조교수 이상은 대개 4급으로 예우하는 관례에 따라 지원하라는 것이다.

아무튼 지원을 했고, 공사 이사직 임명장을 받았고, 한편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박사과정 할 때 동국대학교에서 교직과목 강의를 하고 난 뒤로는 처음 하는 대학강의였는데 결과는 대실망이었다. 글 한 줄 쓰지 못하는 대학생들과의 수업은 결국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 우리 교육의 실패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고, 이 땅의 교사로서 뼈저리게 반성해야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퇴직을 하는 일은 지나온 한 삶의 과정을 돌아보는 일이다. 이력의 이(履)는 신 리자이고 ‘신다’, ‘밟다’는 뜻인데 결국 이력(履歷)이란 신발을 끌고 살아온 삶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한다고 한 세월이었지만, 실패도 부끄럼도 많은 세월이었다. 특히 파주에서의 최근 10년 동안의 생활은 개인적으로 많은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고, 그래서 아내도 유랑생활을 하더라도 파주를 떠나는 것에 흔쾌히 동의를 한 것인데, 한 발이 점점 묶이는 기분이었다.

산행에서 제일 재미없는 것이 원점회귀(原點回歸) 산행이다. 산을 올랐다가 산을 넘어가거나 다른 지점으로 내려가지 않고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차가 산 아래에 있거나, 거기에서 다른 일이 있을 경우인데 등산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별로 재미없는 일이다. 아이들도 다 커서 밖에 나가 살게 되어 빈 둥지가 된 입장에서 파주에 남는 일은 산행으로 치면 원점회귀 산행인 셈이다.

나의 이력서

산다는 건 결국 신발을 끌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일이라는 걸 이력서는 알고 있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놀란 마음으로

가난하고 어리석던 어두운 강을 건너

희끗희끗 빠진 머리의 초로(初老)가 되기까지

몇 켤레의 신발을 버리고 또 몇 켤레

새 신발을 사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얼마나 자주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는지 신발들은 알고 있다

꿈은 희망과 같은 뜻으로 시작했지만

더 자주 허무의 꽃으로 졌고

초록의 냄새를 맡고 길을 나섰지만 대개

희미한 빛으로 끝난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남루한 내 신발들은 알고 있다

초목의 짙푸른 숨소리를 함께 들었으나

네 그르니 내 옳으니 하며 삿대질하던 동무들

하세월을 신발은 모두 지켜보았던 것이다

꽃방석 꽃 잔디 널렸던 날도 더러 있었으나

불똥 끄듯 다급하던 시절이 더 많았고

마늘 싹이 난초 꽃대처럼 솟은 일도 있었으나

애장터 무더기 진달래는 더 오랫동안 피었고

미루나무 잎사귀 이슬방울 함께 맞으며 기댄

아름다운 사람들이 옆에 없지는 않았으나

부끄러워 감히 꺼낼 수 없는 치명적 사랑을

내 신발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걸러내고 걷어내도 쌓이는 앙금과

걸어도 달려도 닿을 수 없는 길의 중간에서

신발을 내던지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던 시절의 터무니없는 노래를

이력(履歷)의 줄 사이에서도 다 말할 수 없었다

임진강, 강물은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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