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14. 대상이 아니라 관계로 인식을 전환하라
- 박두규 「당몰샘」
연기하는 세계는 상호의존적 관계로 이어져 있고, 우리도 그 관계의 한 코로 존재합니다. 나의 의미는 나와 이어진 관계에 의해 주어집니다. 실제로 나와 이어진 관계들을 하나씩 지워보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나는 독립적이고 동일성을 유지하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연기적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 중심에서 ‘관계’ 중심으로 인식의 전환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줄임- 이렇게 관계를 보는 것은 나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의 자리이타(自利利他)로 보는 것입니다. 결국 관계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 나를 풍성하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실천하는 삶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음 시에서 대상에서 관계로 우리의 관점을 이동하라는 강력한 시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당몰샘
- 박두규
구례 장수마을 당몰샘에 가면
대숲 푸른 바람도 서늘히 떠서
그 청정을 어서 퍼 가라 하건만
샘가의 바가지 하나
아무리 물을 퍼 담아도 담아도
물이 담아지지를 않는구나.
아이쿠, 담아지지를 않는구나.
샘가의 살구꽃 무더기도 우습다는 듯
꽃잎 몇 개 내리고서 새침을 떤다.
아흔셋 허연 할머니는
푸르딩딩한 어린 상추를 한 소쿠리 씻더니
당몰샘 한 모금 훌쩍 마시고
돌담길 돌아 총총 사라진다.
아무도 없는 샘에서 슬슬 눈치를 보다
다시금 물을 떠보건만
아, 끝내 물 한 바가지를 퍼 올릴 수 없었다
짧은 시에서 “물이 담아지지를 않는구나”, “아이쿠, 담아지지를 않는구나”, “아, 끝내 물 한 바가지를 퍼 올릴 수 없었다”고 같은 내용의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쿠, 담아지지를 않는구나” 하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한 시입니다.
그런데 왜 바가지에 물이 담기지 않는 것입니까?
- 나와 바가지의 관계가 제대로 설정되지 않아서입니다.
“아흔셋 허연 할머니는/ 푸르딩딩한 어린 상추를 한 소쿠리 씻더니/ 당몰샘 한 모금 훌쩍 마시고” 일어나서 저렇게 가시는데, 똑같은 그 바가지로 물을 뜨는데 목을 축일 한 모금의 물도 퍼 올릴 수 없다면 그것은 바가지질이라는 바가지와 나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상상해보건대 당몰샘 앞에 놓인 그 바가지는 너무나 오래 써서 물이 담기는 오목한 부분이 거의 밥을 푸는 주걱처럼 평평하게 되었거나 깨진 부분을 실로 얼기설기 꿰맨 것일 겝니다. 그러니 바가지 그 자체만으로는 물을 퍼 담을 수 없습니다. 이미 바가지로서의 고유한 요소에 해당하는 물이 담길 모양을 상실한 것입니다. 물을 뜨면 다 새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것이 할머니의 손과 만나면 그런 상태인 채로 물을 풀 수 있는 기능을 합니다. 어쩌면 그 할머니는 밥주걱으로도 물을 퍼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유는, 바가지의 기능을 그 고유 요소에서 찾지 않고 그것을 바가지가 되게 하는 관계적 요소에 작용하는 바가지질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깨진 바가지로 물을 퍼 봤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잘 퍼지지는 않았지만 바가지의 각도를 적당히 하여 잽싸한 손놀림을 하면 퍼 담을 수 있습니다. 유추하자면 그 같은 원리입니다. ‘바가지의 고유한 요소’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바가지를 바가지가 되게 하는 관계’에 작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바가지라는 ‘부분과 대상’에서 바가지가 되게 하는 ‘관계와 관계 전체’로의 전환입니다. 그렇게 하여 내 안에서 바가지 기능을 할 수 있는 소요와 깨진 바가지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를 생각하는 법입니다.
생각의 전환이란 이처럼 ‘대상에서 관계로’(from objects to relationship -프리초프 카프라) 생각의 지점을 옮기는 것입니다. 실체론적이고 요소환원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생각에서 연기적 관계의 원리를 따르는 생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관계에서만 존재하고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깨진 바가지로도 물을 퍼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상에서 관계로의 생각의 전환’의 의미입니다.